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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희 Mar 15. 2016

교육 소비주의를 넘어서

아빠와 두 남매의 Bali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②

아이의 첫 영문 에세이 : My Dream and Nature

발리로 올 때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1년을 외국에서 지내다 오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닌 시기다. 첫째 아이는 6학년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생각하면 애매한 시기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 자체도 너무 제도에 얽매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의 고민은 부모로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가치관과 교육관에 대해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이것은 자녀 교육에 대한 공감대를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린스쿨로 간다. 우리는 결론을 내렸고 본격적으로 입학 지원을 시작했다.

 

지원 서류는 학교에서 제공한 여러 가지 양식 외에 지금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받아야 할 서류, 그리고 첫째 아이의 경우는 영문 에세이까지 제출해야 했다. 입학 조건에 걸리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영어로 의사소통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린스쿨에서도 이 문제를 조금 고민한 것 같았다. 결국 학교에서는 한글 에세이와 그 번역본, 그리고 학생 본인이 지금의 실력으로 쓴 영문 에세이를 요구했다. 그 후로 몇 차례의 이메일이 오간 후 두 아이는 '조건부'라는 딱지가 붙은 공식적인 입학허가를 받았다. 입학 후 ELL이라는 별도의 영어 수업에 참석하는 조건이다. 입학담당관으로부터 온 이메일에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두 아이가 '인텐시브'하게 영어를 훈련하고 오라는 얘기도 적혀 있었다. 급기야 첫째 아이는 세 달 정도 친구가 추천해 준 선생님으로부터 영문법 개인 교습을 받았고, 둘째 아이는 온라인으로 파닉스를 공부했다.


에세이 주제는 '나는 왜 그린스쿨에 가고자 하는가.'였다. 내용만 보자면 일장 연설을 할 수 있는 주제이다. 첫째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동시로 시작해 산문으로 끝난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는데, 그걸 번역해 보내면 냉큼 오라고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영어로 써야 했다. 우리말로 쓴다 해도, 에세이라는 장르가 주는 무게감이 아이에겐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사교육을 일체 거절하고라도, 책 읽기와 글쓰기만큼은 열심히 시키고 싶었는데 결전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아이에게 편안하게 글을 쓰라고 했다. 한 페이지를 조금 넘긴 분량을 써 왔다. 몇 번 수정을 한 후에 글을 완성했다. 환경 다큐를 보고 느꼈던 점, 내성천 여행 이야기, 그리고 동물을 좋아해서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잘 썼다. 이번에는 아는 단어를 최대한 활용해서 영어로 써 보라고 했다. 스스로 쓰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고 문장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문법과 중요한 몇 개의 단어를 알려 주었다. 에세이라고 하기엔 아주 적은 분량의 글이 하나 완성되었다. 문법도 엉망이고, 논리도, 흐름도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호소력이 느껴졌다. <My Dream and Nature>라는 제목이 붙었다. 어쨌든 첫째 딸의 첫 영문 에세이가 완성되었다.


다음엔 입학 서류 목록에서 스쿨 리포트(School Report)라고 기재된 서류를 준비할 차례다. 무슨 서류인지를 몰라서 아이들 초등학교에 문의하니 <학교생활세부기록부>라는 제목의, 무려 열 페이지짜리 서류를 뽑아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1학기까지 아이의 모든 활동 상황과 선생님의 의견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알고 있던 내용들도 많았지만 모르던 내용이 훨씬 많았다. 아이의 학교 출석 기록을 시작으로 각종 수상 내역, 진로 상담 내용, 그리고 체험 활동과 봉사 활동은 물론 과목별로 '세부 능력과 특기 사항'이 서술되어 있었다. 선생님들이 이것을 입력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이런 기록이 있는지도 몰랐다. 학교에서 정말 많은 걸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해 준 아이에게도 고마웠지만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이 기록한 아이들의 활동과 성과 그리고 평가에 관한 내용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부모가 모르던 면이 많다. 집에서는 거의 매일 잔소리에 야단을 맞기 일수였지만 학교에서는 정말로 책임감 있고 집중력 있는, 호기심 왕성한 학습자였다. 예전에 선생님 면담에서도 그런 얘기를 듣긴 했지만, 기록으로 보니 또 달랐다.


교육 소비주의를 넘어서

문제는 두 아이의 생활기록부도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증사무소에 번역을 맡길까 생각했다. 경험상, 서류에 담긴 내용의 전후 맥락과 상관없이 기계적인 번역물을 내놓을 것이 뻔했다.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의 기록이다. 과장이나 왜곡이 없어야겠지만, 있는 그대로를 부모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었다.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는 것이 또 다른 교육 소비  활동이 아니길 바랐다. 그리고 위탁은 더더욱 아니길 바랬다. 부모가 책임지는 더 큰 학교로의 확장이길 바랬다. 부모가 창출하는 교육적 생산 활동이길 바랬다. 이 거창한 가치관에의 첫 번째 도전이 아이들 생활기록부의 번역이었다. 작업은 여러 날이 걸렸다. 문화와 상황이 다르니 적절한 표현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표현이 아이의 학교 생활 기록을 가장 객관적으로 표현해 줄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번역 작업은 고통스러웠지만 부모로서는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이를 외국 학교에 보내는 것이 또 다른 교육 소비 활동이 아니길,
부모가 책임지는 더 큰 학교로의 확장이길,
부모가 창출하는 교육적 생산 활동이길 바랐다.


선생님 추천서도 필요하다. 영문으로 써야 한다. 선생님들의 부담을 덜어 드리기 위해, 아이 편에 추천서 양식을 보내 드리면서 따로 영문으로 내용을 적어 드렸다. 생활기록부를 토대로 작성한 거니까 선생님의 승인을 구하는 의미 정도가 되겠다. 두 분 선생님은 자필로 몇 페이지에 달하는 추천서 양식을 기재하셔서 아이 편에 회신을 주셨다.


이렇게 지원 서류를 준비해 메일로 보낸 후 약 한 달 후에 입학 허가 메일이 왔다. 이렇게 첫 번째 고개를 넘었다. 입학 허가 메일에는 입학 후 별도의 영어 학습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아이의 건강 상황에 관한 서류, 학교의 면책 사항에 관한 서류, 보호자의 신분과 연락처 등을 기재하는 서류를 보내왔다. 온라인으로 확인 후 서명해야 하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수업료 납부와 비자 신청에 관한 안내가 첨부되었다.


입학허가 메일만 받으면 큰 산을 하나 넘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산너머 산이었다. 장기 체류 비자 발급을 위해 발리 현지의 대행사를 소개받은 것을 제외하고, 모든 절차를 직접 진행했다. 학교 서류 중에는 아이의 건강과 안전사고와 관련된 책임 소재에 관한 사항 등 중요하고 민감한 내용들이 있어서 무척 신중해야 했다.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 건강과 관련된 항목들은 의사의 서명이 필요했다. 의사인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마무리했다. 서류에 담긴 모든 내용들의 책임자로서 서류 하나하나에 서명을 마쳤다. 비로소 아이의 생활에 대해 부모로서 큰 책임이 실감 났다.


우리나라는 교육 선진국이다. 공공, 민간 부문 할 것 없이 교육 전문가들, 교육 전문기관이 넘쳐난다. 아이를 맡기면 모든 걸 책임져 줄거라 말한다. 문제는 너무 상업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도 문제지만, 부모로서 자녀 교육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입장이 그저 소비자라는 현실이 더 큰 문제이다. 부모는 자녀를 학교에, 사교육 기관에, 그리고 다양한 활동과 커뮤니티에 참여시키지만, 부모 자신이 참여할 여지가 많지 않다. 일단은 너무 바쁘다. 나도 회사를 사직하기 전에는 평일에 깨어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지가 이미 오래다. 주택, 식량, 에너지, 의료와 법률 서비스 등 삶에 필수적인 것들이 민영화되고, 영리 추구의 대상이 되는 현실 속에서 교육이라는 영역에서조차 소비자로 살도록 강요하는 추세를 거슬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교육 분야에서 겪고 있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대학 입시와 결부된 문제이면서도, 경쟁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든 가치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결국은 소비주의의 오랜 지배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교육 문제는 교육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과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이다. 교육 소비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그 고리를 끊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설계해 나갈 수 있도록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 굉장한 모험이면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다.


부모 역시 자녀의 삶의 굴레를 짊어지기보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교육 시장의 선량한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교육자로서, 철학자로서, 자기 자신과 자녀를 동기 부여하고, 영감을 불어놓고, 필요한 내용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먹고살기도 바쁘고, 아이들 가르치기도 바쁜데 어떻게 부모가 교육자가 되고, 철학자가 될까 의문이 들겠지만,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 학부모로 사는 현실에 비하면 훨씬 가볍고 쉽고 유쾌한 길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입학 허가만큼이나 길고 복잡했던 1년 체류 비자 수속이 마무되었다. 가족들은 나름의 기대와 걱정을 안고 지내면서 발리행 비행기 탈 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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