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두 남매의 발리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13
월요일 아침이다.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허둥지둥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카풀에 태워 보냈다. 집에 와서 보니 아이가 가져가야 할 간식이 냉장고에 있었다. 학기가 3주 차에 접어들면서 긴장과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수요일에 시작한 집수리 봉사는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대충 집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챙겨서 학교로 갔다. 이날 오전에 강당에서 부모들을 위한 프로젝트 페어Parents Project Fair가 열렸다.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활동에 부모가 참여할 수 있도록 부스를 열고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이 주도하는 것도 있었고, 외부 기관과 협력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학생들의 특별 활동 수업인 잘란잘란Jalan Jalan과 연계되었다. 지난주에 처음 참여한 집수리 봉사활동 시방 하우스 프로젝트Sibang House Project도 부스를 마련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몇 군데에 이름을 올렸다. 인숙 누님이 담당하는 인터내셔널 스낵 파티International Snack Party와 , 오픈 스트리트 매핑 프로젝트Open Street Mapping Project에도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폐식용유로 바이오 디젤을 만들어 스쿨버스 연료를 공급하는 교내 NGO 바이오 버스Bio Bus, 그린스쿨의 재활용 센터에 해당하는 켐발리Kembali, 지역 아동들에게 환경 교육을 제공하는 메이MEI를 비롯해서 십 수 가지의 활동이 소개되었다.
여러 프로젝트들을 둘러보면서 이들의 공통된 주제는 환경, 지역, 지속가능성, 협력과 연대라고 정리해 봤다.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활동들이다.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내실 있게 운영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학교가 지역의 문제를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굉장히 창의적이고 능동적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학교가 학부모와 지역, 그리고 외부 기관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과정도 배울 점이 많았다. 학생들에게는 적성을 발견하고 필요한 역량을 쌓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과 학부모, 지역 주민들을 혁신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프로젝트 페어에 다녀온 지 몇 주가 지났다. 집수리 봉사를 제외하고, 그때 신청한 프로그램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픈 스트리트 매핑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HOTHumanitarian OpenStreetMap Team팀에서 킥오프 미팅을 한다고 이메일이 왔다. 오픈 스트리트 매핑은 온라인 협업으로 디지털 지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글로벌 비영리기구와 연계된 활동이다.
이 프로젝트가 하이스쿨에서 새로운 텀의 잘란잘란 수업으로 시작된 것이다. 집수리 봉사에 집중하기 위해 이 모임은 포기할 작정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영어로 소통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집수리 봉사의 단짝, 아니 그린스쿨에서 만난 학부모 중 가장 단짝처럼 지내던 토니Tony가 굉장한 관심을 보이며 이 모임에 나갈 거라고 했다.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자재 문제 등으로 집수리 봉사의 일정이 지연되면서 일거리가 줄어들고 있긴 했다. 영어는 쓸수록 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결국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토니를 따라 HOT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수요일 아침 일찍 교실에서 킥오프 모임을 가졌다. 하이스쿨 학생들의 수업과 같이 진행되었다. 과학을 가르치는 제이드Jade가 담당 교사였고, HOT에서 나온 메이리 오하라Mhairi O’Hara 박사가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었다.
이 지도가 필요한 곳은 홍수, 지진, 산불 등 대형 재난의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구글 지도에서도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 지역에 특히 필요했다. 한 예로, 2010년 아이티의 대지진으로 순식간에 지형이 바뀌어 버렸다. 오픈 스트리트 맵에 참여한 봉사자들은 실시간으로 지형의 변화를 반영했고, 구조대원들은 그 지도를 토대로 구조 활동을 벌였다.
그린스쿨에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유는 이웃 섬 보르네오의 산불 때문이었다. 칼리만탄 지역에 발생한 수많은 산불로 인해 사람들과 동물들이 위험에 처한 경우가 많은데, 그 상황을 신속히 공유하고 소방차 등이 접근로를 찾기 위해서 상세한 지도가 필요했다. 특히 열대 우림에서는 육로보다 수로가 이동에 더 효과적인데, 구글 지도에서는 이러한 정보가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온라인으로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인터넷을 통해 웹사이트에 접속한 후 화면에서 제공되는 위성사진을 바탕에 깔고,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전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진에 표시된 도로와 강, 건물 등을 그리는 방법으로 진행이 되었다. 초등학생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작업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오픈 스트리트 맵에 참여한 사람은 150만 명에 달하고, 2천만 건이 넘는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날 수업에서는 HOT 프로젝트의 현황을 듣고, 온라인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하라 박사의 설명을 듣고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토니와 이프If가 같이 있어서 마음도 편했다. 이 수업에 참석하는 학생 타즈Taj의 부모인 민터Minter 부부도 아들과 함께 지도 작업에 참여했다.
우붓에 있는 인터넷 카페인 후붓HUBUD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이곳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인터넷이 정말 빠르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개인적인 업무 공간으로 활동하기에도 좋지만, 프로그래머들의 워크숍이나 스타트업 관련 컨퍼런스가 자주 열리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오리엔테이션으로 개발용 테스트 서버에서 실습했는데, 이번에는 정식 서버에서 온라인 지도 작업을 했다. 그린스쿨에서는 칼리만탄의 산불 피해 지역을 맡았는데, 토니, 이프와 셋이서 인접 구역을 맡아서 작업했다. 진도는 많이 못 나갔지만,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일주일에 30분 정도라도 시간을 정해서 맡은 구역의 지도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크숍을 마치고 이프가 추천해 준 수마트라 스타일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뿌뜨리 미낭 빠당 푸드Puteri Minang Padang Food라는 음식점인데, 나름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음식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아주 괜찮았다. 근사한 식사에 음료까지 45,000 루피아가 나왔다. 우리나라 돈으로 4,000원 정도이다. 집에서도 가깝고 오토바이도 새로 빌렸으니 아이들과 한번 와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바로 옆의 서점도 둘러봤다.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정리한 서점이었다. 중고책과 음반도 있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 팀에 참여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의 작은 보탬이 재난 구조 활동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지금까지는 집단 지성이나 클라우드 소싱과 같은 개념들이 말만 무성하고 내 삶에서의 실재가 없었는데, 이 봉사를 통해 참여의 힘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그린스쿨에 보낸 덕분에 아빠가 재미를 보는 것 같다. 아무래도 수업료는 내가 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