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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희 Jun 17. 2017

화합의 섬, 길리 트라왕안

발리 그린스쿨에서 만난 한중일 세 나라 가족들의 길리 섬 여행 이야기

첫째 날


발리 그린스쿨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자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방학 동안 떠날 여행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일본 가족들 몇몇이 길리Gili 섬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우리 가족을 포함한 한국 가족 두 집과 타이완 가족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어른과 아이들을 합해 약 30여 명의 대그룹이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목적지는 길리 트라왕안Gili Trawangan 섬이다. 롬복 섬 북서쪽 연안에 나란히 떠 있는 세 개의 길리 섬 중 가장 큰 곳이다. 




우붓 뉴꾸닝 축구장에서 아침 7시에 전세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이곳저곳을 돌며 여러 가족들을 태우고 한참을 더 달렸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발리 섬 동쪽의 항구도시 빠당바이Padang Bai였다.  일본인과 결혼한 발리 출신 꼬망Komang이 우리가 예약한 배편을 확인해 주었고, 일행은 곧 배에 올랐다. 겉보기에는 작아 보였는데, 객실에 들어가 보니 좌석이 200개는 되어 보였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오더니 객실은 곧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찼다. 



배는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실내가 답답해 뒤편의 야외 데크에 나가 보았다. 후미에 여섯 개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시끄러웠지만 시원했다. 섬들의 풍경도 이채로웠다. 






배는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롬복Lombok 섬, 길리 아이르Gili Air 섬을 거쳐 길리 트라왕안에 도착했다. 선착장에는 우리가 타고 온 배 말고도 여러 척의 크고 작은 보트들이 사람들을 싣거나 내리고 있었다. 한적한 외딴섬인 줄 알았는데 여행객뿐 아니라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배에서 내려 숙소까지 20여 분을 걸었다. 햇볕이 따가웠다. 걷다 보니 수많은 우산으로 덮인 거리가 나타났다. 그늘이 반가웠다. 거리는 굉장히 활기차 보였다. 다이빙 샵과 온갖 종류의 식당들로 꽉 들어찼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빌라 옴박Villa Ombak이었다. 규모가 제법 커 보였다. 리조트 정원에는 발리에서 볼 수 없었던 오래된 열대 식물들이 가득했다.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객실이 무척 넓었다. 2인실인데도 침대 외에 넓은 카우치가 있어서 엑스트라 베드가 필요 없었다. 아이들은 잘 정돈된 호텔 방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침대로 뛰어든다. 첫째 아이는 호텔방 냄새가 좋다고 킁킁댄다. 둘째 아이는 침대 옆 카우치를 선점했다. 침대보다 불편할 텐데, 아이들은 뭔가 색다르고 예외적인 걸 좋아한다. 






아이들이 해변으로 달려갔다. 바다 빛이 환상적이다. 해변은 산호가 부서져 생긴 순백의 고운 모래로 덮여 있었다. 군데군데 산호 조각들이 쌓여 있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바다는 스노클링을 즐기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멸치처럼 보이는 작은 물고기 떼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아이들은 그걸 잡겠다고 손을 뻗고 허우적 댔지만 소용없었다. 촘촘한 그물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수면을 스치며 멸치를 채 가는 갈매기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물속 산호를 들추면 어김없이 숨어있던 물고기가 달아났다. 물고기를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힘이 빠졌는지 물 밖으로 나와 산호와 모래로 이것저것 만들며 놀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늘 보던 사이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어도 잘 어울렸다. 



리조트 안으로 자리를 옮긴 아이들은 거기서도 신나게 놀았다. 풀장에는 다이빙 훈련에 쓰이는 3미터 깊이의 풀이 있었는데, 발리에서 지내는 동안 물과 친해진 우리 두 아이들은 거기에도 텀벙텀벙 뛰어들었다. 나무 그늘에 마련된 탁구대도 아이들 차지였다. 모래밭에서 공을 차기도 했다. 



엄마들은 그늘에 앉아 코코넛과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일본인 엄마들은 학교에서 항상 이렇게 모여 대화에 열중이다. 이번 여행 일행 중 아빠는 꼬망과 나 둘 뿐이다. 꼬망은 아마추어 사진작가이다. 아마추어라고는 하지만 사진 실력이 대단했고, 최근에 고향인 싱아라자에 사진관을 열었다. 꼬망은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후 여섯 시가 넘어가자 빠르게 어둠이 깔렸다. 호텔 앞 해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샐러드 뷔페가 마련되었고, 원하는 해산물을 고르면 그릴에 구워 주기도 했다. 피자는 아이들에게 항상 인기 메뉴였다. 


늦도록 그린스쿨 가족들과의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같은 학교 학부모라는 동질감이 크게 느껴졌다. 40개국 가족들이 모인 그린스쿨에서는 한중일 세 나라가 동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다는 점이 오히려 서로에게 유대감을 주는 것 같았다. 우스갯소리로 이번 여행을 한중일 단합대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발리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여행자의 삶이지만, 태평양과 인도양의 경계에 자리한 낯선 땅에 나와 보니, 가족과 집의 의미가 더 크게 와 닿았다. 길리섬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둘째 날


이번 여행에 동행한 일본 가족의 친구 한 분이 아이들을 위해 쿠키 아트 클래스를 열었다. 레이나Reina라는 분이었다. 객실을 하나 정해서 거기서 클래스를 진행하기로 했다. 가족들의 객실에서 의자와 테이블을 있는 대로 가져왔다. 호텔 방이 아이들로 가득 찼다. 




레이나는 작은 쿠키에 색을 입히고 크림으로 글씨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레이나의 안내에 따라 먼저 종이 위에다 연습을 한 후 쿠키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너무 집중을 한 나머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이들이 받은 재료에는 박쥐, 사탕, 하트 등 여러 모양의 쿠키가 들어 있었다. 레이나는 샘플로 완성된 쿠키를 하나 보여 주었다. 할로윈데이가 얼마 남지 않아서인 듯 귀여운 박쥐가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걸 따라 박쥐를 그렸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박쥐 모양의 쿠키 위에 천사를 그려 넣었다. 처음부터 천사 모양의 쿠키인 듯 절묘하게 어울렸다. 


아이의 마음이 천사 같아서가 아니라 타성을 거스르는 저항의 표시 같았다. 첫째 아이는 본격적인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다. 아이의 발상에 아이들도 엄마들도 감탄을 했다.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쿠키에 그림 그리는 일에 집중했다. 클래스는 거의 일본어로 진행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따라가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오후에는 스노클링 투어를 하려고 알아보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서너 시간 일정으로 아이들에게는 다소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은 호텔 앞의 얕은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즐겼다. 물도 따뜻하고 작고 예쁜 물고기들이 많아서 아이들이 놀기에 좋았다. 레스토랑에서 앉아서도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아이들의 안전 상으로도 그게 나았다. 


몇몇 가족들이 일몰을 보러 가자고 했다. 호텔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 일몰을 보려면 해안선을 따라 돌아서 섬 반대편으로 가야 했다.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고, 길도 좀 울퉁불퉁해서 아이들이 고생을 좀 했다. 마차와 마주칠 때마다 안전을 위해 길 가에 멈춰 서서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복잡한 곳을 좀 벗어나니 길이 많이 한적해졌다. 서쪽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두 아이를 뒤에서 따라갔다. 오렌지색 재킷을 입은 아이들이 노을에 파묻히는 듯했다. 자연은 경이로웠고, 아이들은 대견했다. 어썸awesome!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기에는 이만한 단어도 없는 듯했다.



20분쯤 달려서 비치 클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일행을 만났다.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서쪽 하늘은 더욱 붉게 물들었고, 잔잔한 바다는 그 색깔을 그대로 비춰 냈다. 




노을 속에는 높은 산 하나가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약 30km 떨어진 발리 섬의 아궁산이다. 3,000m 높이의 산은 그 먼 거리에서도 위용을 드러냈다. 




썰물에 드러난 해변은 산호로 가득했다. 돌을 들출 때마다 게들이 달아났고, 아기 불가사리들이 꿈틀거렸다. 아이들은 거기서 게를 잡으며 놀았다.  


"어느 순간의 강렬함을 죽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실뱅 테송, <희망의 발견 : 시베리아의 숲에서> 


굉장히 공감을 하는 말이지만, 숨 막히는 일몰과 그 일부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충동을 억누른다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셋째 날


어젯밤에 타이완 엄마 샤오위Xiao Yu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어제 자전거로 하려다 못한 섬 일주를 해야겠으니 마차를 빌려 같이 타자는 내용이었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약속대로 아침 일곱 시에 로비로 나갔더니 마차가 여덟 시에 온단다. 나온 김에 아침 식사를 했다. 노부코Nobuko 네 가족과 합해서 마차 두 대에 나눠 탔다. 


길리 섬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다. 사람이건, 짐이건 모든 운송은 말들이 담당한다. 말들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마부에게 물어보니 말들은 하루 5시간 일한다고 한다. 충분히 쉬며 일하고 있으니 걱정 말란다. 많은 여행객들의 질문에 준비된 답변처럼 들렸다. 


좁은 길에 많은 사람들과 자전거, 말들이 양쪽으로 오가니 굉장히 혼잡했다. 섬 가장자리로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아이들은 마지막 날 오전까지 알뜰하게 놀았다. 둘째 아이는 탁구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축구를 많이 못해 무척 아쉬워했다. 길리 섬은 축구할 곳이 없어 안 좋단다. 숙소를 나와서 다시 배를 타러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다시 오고 싶은 곳이지만, 발리에 있는 동안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서 그건 어려울 것 같다.  




발리의 빠당바이로 돌아오는 배도 사람들이 꽉 찼다. 이 작은 섬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게 신기했다. 잘 가던 배는 엔진에 문제가 생겼는지 가끔 서행을 했고, 아예 멈춰 서기도 했다. 빠당바이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첫째 아이는 바닷속 물고기들을 좋아했고, 둘째 아이는 수영과 축구와 탁구를 즐겼다. 일본, 타이완 친구들과도 재미있게 어울렸다. 수 천년의 세월 동안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반복해 온 한중일 세 나라의 가족들은 대자연이라는 보편적인 혜택 속에서 오히려 일체감을 느꼈다. 그린스쿨에서 이렇게 좋은 가족들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그린스쿨의 첫 번째 방학을 동아시아 대동단결의 시간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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