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두 남매의 Bali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④
드디어 첫 등교일이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비 오는 소리에 부리나케 나가서 운동화를 들여놨다. 다시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려니 평소보다 일찍 깬 아이들이 하나 둘 내려온다. 처음 세 달 간, 아이들 등교는 벅스BUGS라는 회사의 카풀을 이용했다. 동네 축구장 옆의 큰 나무 아래서 차가 출발한다. 두 아이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탔다. 8인승 승합차가 거의 다 찼다. 나는 오토바이로 차를 뒤따라 학교까지 갔다. 교통체증이 없더라도, 앞에서 서행하는 커다란 트럭 때문에 등교에 소요되는 시간은 들쑥날쑥할 것 같았다. 첫날 학교까지는 25분 정도 걸렸다. 아침에 오토바이로 발리의 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괜찮았다. 넓은 들판을 지나기도 했고 복잡한 시장 거리와 학교 앞을 지나기도 했다.
학교 주차장은 자동차와 오토바이용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자동차 공간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오토바이는 세울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오토바이를 세우고 두 아이를 교실에 데려다주었다. 둘째 아이의 교실에 잠깐 머물러 있다가 다른 부모들과 함께 강당Sangkep에 모였다. 부모님들을 위한 티 타임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많은 얘기를 하지 못했는데, 이날 여러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둘째 아이는 쉬는 시간마다 내가 주로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카페로 와서 구조 요청을 하곤 했다. 첫날 점심 메뉴 중 햄버거가 있었는데, 준비해 놓은 것이 다 떨어져 다시 만드느라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다. 아이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에게 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다른 메뉴 말고 햄버거가 먹고 싶었는데, 말이 안 통하니 답답했나 보다. 아이를 따라 식사 장소로 가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줬다. 첫째 아이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을 하는 교실을 찾지 못해서 내가 데려다줬다. 첫날의 혼란스러움,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 그리고 아이의 울먹이는 표정, 아이들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을 그 장면들이 지금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모든 학년의 수업은 3시 15분에 끝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등교해서 그 시간까지 있는 게 아이들에겐 조금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가 한국에서보다 더 늦게 끝난다고 투덜거렸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의 학교는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과,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로 가득하다. 아침에도 그랬듯이 부모들은 서로 인사와 소개를 하느라 부산하다.
많이 피곤할 것 같아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불을 끄고 고요해진 집안으로 자연의 소리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발리에 와서 자연을 듣는 법을 배웠다. 잠자리에 들 무렵부터 새벽까지 온갖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한데, 아이들더러 몇 가지 소리인지 구분해 보자고 했더니 대략 여섯 가지는 알겠단다. 희미한 소리까지 대략 열 가지는 넘을 것 같다. 깜깜한 밤에 소리만으로 자연을 인식하는 경험은 온갖 비주얼이 가득한 시대에, 눈이 쉴 때가 없는 시기에,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발리에 오기 전에도 이렇게 잠든 아이들을 가만히 쳐다본 적은 많다. 이른 출근으로 아직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그렇게 쳐다보았고, 밤 열 시가 넘어 퇴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아빠를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잠을 미루다 지쳐 잠들기 일쑤였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출근하고 없는 아빠를 찾기도 했을 것이다. 부모의 마음에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여기서는 조금 달랐다. 침대에 누워 같이 성경을 읽고, 개구리와 풀벌레 소리를 듣고,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일기장을 점검하고, 이불을 덮어준 후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은 확실히 달랐다. 미안함과 아쉬움 대신에,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몸소 겪어내야 할 아이들에게 응원과 기도를 들려줄 시간이고, 이날을 준비하기 위해 뜻을 모았던 우리 부부에게도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전해야 할 시간이다.
둘째 날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인도네시아 독립과 새 학기를 기념하는 힌두교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등교했다. 아이들도 나도 전통 의상을 준비해 놓긴 했지만, 학교에서 힌두교 의식이 치러지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참석시킬지, 나는 참석을 해야 할지 조금 고민을 했었다.
발리는 신들의 섬이라 불린다.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도 프레임 안에 사원과 석상이 빠지지 않는다. 힌두교를 하나의 종교로 생각한다면 굉장히 부담이 큰 환경이다. 이런 환경 자체가 기독교인으로서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 신앙에 도전을 가하는 것도 아니지만, 학교 커뮤니티에, 지역과 공동체에 녹아들어 삶을 섞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히브리인들이 역사의 대부분을 이런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많이 놀랐다.
"기꺼이 능숙하게 가나안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형식을 차용한 히브리인들이 어떤 의미에서 아주 편안하게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또한 분별의 훈련도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경우 그 문화를 거부할 줄도 알았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신들을 찬양하는 문화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지독하게 한 하나님에게만 충성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저녁에 아이들에게 하루의 소감을 물었다. 기독교인으로서 힌두교 의식에 참석한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나 보다. 향 냄새가 강해서 힘들었고,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건 너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거부감일 거라고 일러주었다. 학교는 지역성을 추구하는 일환으로 힌두교 의식을 치른 것이지, 종교성 자체를 추구하는 어떤 철학도 표방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역시 현지의 문화로서 이러한 환경을 수용하고 분별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하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 줬다.
의식이 끝나고 커다란 운동장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새 학기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교 운동회가 벌어진 것이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키가 장대만 한 하이스쿨 아이들까지 전교생이 어우러진 모습은 어김없이 축제 분위기였다. 아이들은 서너 학년을 묶어 불, 물, 흙, 공기 이런 이름으로 팀을 나눈 후 곳곳에 마련된 종목에 참가했다. 아이들 함성 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 활기가 넘친다. 추석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마을 사람들과 학생들이 어우러졌던 고향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가 생각났다. 새 학기가 시작한 둘째 날 전교 운동회라니. 일단 신나게 뛰어놀고 보자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날의 의식과 운동회는 새 학기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축제의 성격이 컸다. 독립기념일이 다가오면서 마을마다 줄다리기 시합이 열리는 것처럼, 이날 운동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도 줄다리기였다.
우리가 발리에 머물던 해의 8월 17일은 인도네시아의 70주년 독립기념일이었다. 우리의 광복절과 날짜가 비슷한 이유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도 일본의 지배를 받았었다. 며칠 전부터 도심이고 시골이고 할 것 없이 적색과 백색의 인도네시아 국기로 가득했다.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커다란 국기를 높은 대나무 장대에 매달았다. 며칠 내내 비어있던 축구장에선 경찰이 교통정리를 해 가며 경기를 치르고 있었고, 곳곳에서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꾸닝의 커다란 축구장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커다란 줄을 당기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며칠 전에 덴파사르 중앙의 전쟁기념관을 찾았었다. 석조 건축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건물과 정원은 수려한 모습을 자랑했다. 1945년 8월 17일을 기념하기 위해 45m 높이에 8개의 기둥과 17개의 계단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발리섬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볼 수 있도록 작은 모형과 설명을 붙여 놓았다. 특히 네덜란드와 일본의 침략과 항쟁의 역사가 잘 그려져 있었다. 아주 소박한 규모의 독립기념관이었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독립기념일을 수십일 앞둔 날부터 온통 인도네시아 국기 천지다. 발리의 주도(州都)인 덴파사르부터 작은 시골마을의 골목길에까지 축제 분위기다. 날짜 상으로 이틀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역사와 같은 사연이다. 그런데 그 날을 기념하는 기운이 참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는 진정 독립을 한 건가.
금요일마다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강당에 모인다. 우리나라의 학교로 따지자면 조회(朝會)에 해당한다. 큰 차이라면 월요일 아침이 아니라 금요일 오후에 열린다는 것이고, 더 큰 차이는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연설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가장 큰 차이는 학생과 선생님들 뿐 아니라 학부모와 지역 사회, 그리고 학교와의 협력 네트워크 모두를 위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유치원과 저학년 아이들이 강당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으면 주변의 스탠드에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가 자리를 잡는다.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강당 뒤쪽에 서서 참석하는 부모들도 많다.
새 학교에서의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금요일 어셈블리는 첫 주의 대미를 장식할 만큼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시작 시간 전부터 강당 주위로 은은하면서도 경쾌한 마림바 합주가 울려 퍼졌다. 강당 옆의 조그만 오두막에서 미들스쿨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대나무로 제작한 마림바들을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 자사회를 맡은 선생님이 큰 박수로 새 학기 새 가족을 맞이하자고 제안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첫 주를 보낸 새 가족으로서 그때의 박수와 함성은 한 주의 긴장과 피로를 다 씻어주는 듯했다. 이어서 새로운 가족과 오랜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한 가족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처음으로 그린스쿨에 합류한 선생님과 직원들도 많았다. 사회를 맡은 선생님은 55명 선생님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불렀다. 그때마다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담임 선생님의 이름이 나오자 열광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환영하는 시간을 가진 후 중요한 공지 사항들을 몇 가지 전달했다. 새 학기 첫 번째 어셈블리는 교가를 부르며 마무리했다. 기타를 맨 선생님을 중심으로, 몇 가지 악기로 구성된 밴드의 흥겨운 연주가 흘러나왔다. 교가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가사도 감동적이었다.
그때 몇몇 유치원 아이들이 강당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뛰어들면서 강당은 춤판으로 변했다. 교가를 부르며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춤을 추며 교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사도 모르고, 분위기도 어색한 둘째 아이는 스피커의 볼륨이 너무 컸는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막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첫 번째 어셈블리는 낯선 세상에서의 첫 주를 무사히 보낸 모든 새 가족 들을 향한 격려와 응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어셈블리의 내용과 형식과 기운에 큰 감동을 받은 시간이기도 했다. 왜 나는 12년 동안 조회 시간마다 논에 심은 나락처럼 꼿꼿하게 서서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을까. 왜 우리의 학교는 그런 내용과 형식의 조회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일까.
즐겁고 인상깊은 어셈블리는 첫날만의 특별함은 아니었다. 이후로 이어진 매 주의 어셈블리를 통해 아이들은 일주일간 배우고 경험한 것을 춤으로, 노래로, 발표의 형식으로 학교 공동체와 공유한다. 지역 협력 사업의 경과를 발표하면서 학생들과 학부모의 참여를 요청하기도 한다. 보르네오 섬에서 시작되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하늘을 뒤덮었던 연무의 근원지 칼리만탄에서 활동가가 날아와 현지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때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후속 활동들이 일어났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학교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소통이 무엇인지, 표현하고 공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배워가고 있다. 책이 아니라 행동으로 배우고(Learning By Doing), 삶을 통해 배우는(Learning By Living) 토대가 잘 다져져 있었다.
그린스쿨에서의 첫 번째 일주일은 두려움과 긴장, 설렘과 감동이 어우러진, 몸도 마음도 아주 바쁘고 정신없던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수업 첫날 점심시간에 울먹이던 아들은 둘째 날부터는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고 즐기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 보였다. 긴장이 가득하던 얼굴에는 웃음이 돌고 장난이 늘었다. 오전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나를 찾아와서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얘기하기도 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아빠가 도와줄 것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없다고 한다. 아이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용감하고, 영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