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두 남매의 Bali 이야기, Green School 이야기 ⑤
등교 시간을 맞은 학교의 부산함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먼저 도착한 차에서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쏟아져 나온다. 머리 모양도, 피부색도, 옷차림도 형형색색이다. 교실로 들어서면서 부모들과 인사를 나누는 아이들의 언어도 제각각이다.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모습들이 하나의 학교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모습은 등교 첫날 맞이한 어떤 경이로움이었다.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간 후 부모들은 주로 교문 안쪽의 카페 그린 와룽Green Warung에 머문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프레이크Freak와 리빙푸드랩Living Food Lab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부모들은 여기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코코넛 오일을 얹은 유기농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하기도 한다.
학기 초에는 학교에 남아있는 부모들이 무척 많았다. 모두에게 이곳은 객지이고, 오늘은 학기 첫날이고,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그래서인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제법 많은 부모들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일상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부모들이 이렇게 많았다. 아이와 부모 자신을 위해 이곳으로 날아오기로 용감한 결정을 한 이후에도, 그 삶의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적지 않다. 나 역시 예전에 한국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개인적으로 새로 시작해야 할 일을 나중으로 미뤘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학교에 정착하기까지는 아이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학교에 머물면서 이곳에서의 경험과 느낌을 기록하거나 이후의 계획을 구상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는데, 처음 몇 주 간은 세계 각국의 부모들과 만나 사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등교 첫날 학교에서는 부모들을 위한 티 타임을 마련했다. 상캡Sangkep이라 부르는 강당에 커피와 차, 그리고 간단한 식사와 스낵이 준비되었다. 나도 커피잔을 들고 다니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와 소개를 나눴다. 여러 나라의 부모들과 친분을 쌓는 것은 그린스쿨의 부모가 누리는 큰 행운이었다. 학교의 교육 철학과 자연적인 환경에 감동해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삶의 가치관과 교육관에서 공감대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 나라를 불문하고 자국의 교육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도 비슷했고, 유년기의 아이들에게 어떤 경험의 기회를 주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에도 놀라울 만큼 공통점이 많았다.
스위스에서 온 니콜Nicole과는 학기 초에 많은 얘기를 나눴다. 스위스에서 뭐가 부족해서 여기까지 왔나 싶었는데, 이곳에 오게 된 계기가 우리와 비슷했다. 니콜 가족은 독일 출신이었고, 스위스로 이주해서 15년 정도 살았는데, 그곳은 참으로 변화가 없고 답답했다고 한다. 큰 아이가 이 학교의 정보를 접하고 이곳으로 오자고 했고, 어머니도 동의하고 영어를 못 해서 머뭇거리던 다른 두 아들을 설득했다. 막내 아이가 영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교실에 앉아 통역을 해 가면서 아이들을 돌봤다. 그 얘길 들으니 나는 둘째 아이를 너무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아들 말론Marlon은 우리 둘째와 절친이 되었다. 둘 다 너무 축구를 좋아했던 것이 이유였다. 1년 내내 수업이 끝나면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기다리느라 한참을 학교에서 머물곤 했다.
미국 중부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다 온 올랜도Olando, 세라Sarah 부부와도 인사를 나눴다. 올랜도와는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서로 소개했는데 일 때문에 다음 날 미국으로 가서 아직도 비행 중일 거라 한다. 비행시간이 대략 30시간 정도라고 했다. 미국과 발리를 오가며 한 달씩 머무를 계획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 출신 제프Jeff, 마르타Marta 부부와도 인사했다. 마르타는 자녀 교육과 가족관에 대해 아주 말이 잘 통했다. 이 부부는 전형적인 미국의 직장인 생활을 접고, 재충전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아이들이 같은 학년이 아니었지만, 이 두 미국 가족들과는 1년 내내 가깝게 지냈다. 아이의 생일을 맞이해 서로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새집으로 이사를 하거나, 또는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방과 후에 집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얀Jan은 남동생이 입양 한국인이다. 몇 년 전에 온 가족이 남동생의 친모를 만나고, 버스를 빌려 한국 일주 여행을 했는데 굉장히 인상 깊고 좋았던 시간이라고 한다. 딸 문체Moontje가 첫째 딸과 같은 7학년이다. 얀 가족과는 발리에 있는 동안 정말 가깝게 지냈다. 가끔 에코비치Echo Beach에서 모여 놀기도 하고 식사를 함께 했다. 특히 사업 얘기를 많이 나눴다. 얀은 아프리카 사파리 투어를 판매하는 온라인 마켓플레이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2,3년 정도 개발 기간을 거쳐 막 유료 서비스를 오픈했는데 예상보다 굉장히 성과가 좋아서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나도 비슷한 유형의 사업을 준비하던 터라 많은 조언을 얻었다.
호주 서부에서 온 피트Pete, 질Jill 부부와는 학기 초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집수리 봉사에 함께 참여하면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피트와 함께 부엌 수리를 맡았는데, 워낙 힘든 작업인데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아서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피트와는 호주의 경제와 산업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고, 특히 광산 얘기를 많이 들었다. 피트는 광업 분야의 컨설턴트로 일했었다. 피트와 대화하면서 호주를 한번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두 번째 텀 방학 때 한국의 두 가족과 합류하여 세 아빠와 여섯 남매의 서호주 여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일본인 아내와 함께 온 발리 출신의 코망Komang과 얘기를 많이 했고, 많이 친해졌다. 코망은 발리섬 북부의 중심 도시인 싱아라자Singaraja 출신이란다. 아내는 일본에서 책을 여덟 권이나 낸 작가였다. 지금도 책을 쓰느라 바쁘고, 조만간 3권의 책을 탈고할 예정이었다. 그의 딸 지하야Chihaya는 둘째 아이와 ELL 수업에 함께 참석했다. 역시 아이의 절친 중 한 명이다.
학교 활동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첫 학기 한국 가족은 5 가족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이번 학기에 새로 온 가족만 10 가족이 넘었다. 일본 가족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는 미디어 때문이었다. 지난해 TV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그린스쿨이 소개되었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도 일본 취재팀이 몇 차례 다녀갔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로 언급되는 것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다. 직접적인 피해가 없더라도 안전과 환경에 대한 니즈가 급격하게 커진 것 같다.
한 번은 일본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기획한 여행에 한국 가족과 타이완 가족이 초대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열두 가족이 참여한 이 여행은 그대로 범아시아 단합대회가 되었다.
8월 학기가 시작하고 두 달 정도는 거의 매일 새로운 가족을 만나 인사를 했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없어 두 번, 세 번씩 소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워낙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이름을 잊어 다시 물어보는 것을 실례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이름을 다시 물어보고 기억하려고 애썼다. 나도 그랬고, 다른 부모들도 이곳에서의 만남과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 학기에 그린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국적은 38개국이란다. 타이완, 싱가포르, 일본,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 스웨덴, 네덜란드, 헝가리, 독일,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 캐나나, 호주를 포함한 영미권 국가들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주로 선진국 출신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발리의 국제학교 중에서도 가장 학비가 비싼 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큰 사업을 운영하거나 재산이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족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그린스쿨에 아이를 보내는 데 있어서 경제력이 어떤 요건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다양한 목적과 이유들 속에는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녹아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환경에서 학습하는 것,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들어있었다.
최초의 타지 생활에 이처럼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섞이게 된 것이 부모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도 크고,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분별력은 더 성장해 가는 것을 느꼈다. 안으로는 자유로운 정신과 창의성을, 밖으로는 글로벌 시민 의식과 다양함에 대한 수용성을 함양했던 1년이길 바랬고, 실제로도 그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