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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작가와 문학 작가가 싸우면

이기는 편 우리 편!

by 안녕

"광화문 전체에 은근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폭풍이 불어 닥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감. 병장기를 꺼내 드는 소리, 전열을 가다듬는 목소리가 살풍경한 빌딩 숲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듯했다."


"수평 비행으로 강을 건너는 새들이 순간, 구두점처럼 하늘에 찍혀 있다. 새들은 천천히 다가오는 듯하다가 속도를 냈고, 화살처럼 머리 위를 휙 지나갔다. 하늘엔 색깔이 없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Q. 위 인용구 두 개를 비교하여 웹소설과 소설로 구분하면?




ChatGPT Image 2025년 9월 8일 오후 10_13_41.png 웹소설 작가와 문학소설 작가가 겨루는 장면을 일러스트로 표현해 줘, 하고 요청했을 때 챗GPT 반응.


지적 허영으로 충만하던 20대 때에는 대중문화나 B급 문화를 등한시하곤 했다.

예술만 못하다며 '급'이라도 매기려 했던 듯하다.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한 번은 BL(Boys Love, 남성 동성애 장르를 일컫는 콘텐츠 분류) 광팬인 대학 동기가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 알고는, 꼭 읽어보라며 예약 구매한 소설책 한 권을 빌려줬다.


표지며 내지 디자인이 조악한 느낌이 들었지만, 잘 쓴 글이라니 읽고 싶었다.

단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강렬했다.


술술 읽히는 문장력 하며, 복선과 잘 맞아떨어지는 사건 전개.

어떤 면에서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문단에서 쏟아내는 글보다 나았다.


그만큼 잘 쓸 자신도 없었다.

(장르 특이성을 따라잡을 자신도 없다.)




재야의 은둔고수가 여기저기 활개를 친다.

브런치 구독자 수가 꼭 그 작가가 쓰는 글이 갖는 작품성과 일치하지는 않듯.


예술은 특유의 모호한 상징을 통해 보통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남겨둔다.

이 모호함이 예술과 대중문화를 구분하며 권위를 벽처럼 두르고 한 계단 높이 올라간다.


난해한 예술은 대체로 더 좋은 평가를 받고-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대중은 예술 영역 밖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때로는 작가도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흘려 놓고는, 열린 결말이라고 던져두기도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y3kvvqy3kvvqy3kv.png 제미나이 작품. AI 두 가지 다 흥미롭다. 이제 제법 내가 프롬프트를 좀 다루게 되기라도 한 걸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다르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중의 잣대는 날카롭고, 다수이며, 직설적이다.


각 사건 간 개연성이 조금만 부족해도 웹소설 독자들은 '하차'를 들먹인다.

그래서 예술만큼 지루한 문장이 없고, 난해하거나 개연성 없는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자, 그럼 이제 누가 승자이지?




당연히 그런 건 없다.

개별 문화 콘텐츠가 담당하는 영역이 있을 뿐.


나는 19살에 수능을 마치자마자 이영도 작가 작품 <드래곤 라자>를 하루에 서너 권씩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본업이 소설가인 교수님은 나와 취향이 같았다.


같은 작가가 쓴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는 문학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시며.

나는 그가 했던 얘기가 참 좋았고,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다수의 콘텐츠는 진열대에 진열하는 상품처럼 특정 타깃 소비자를 염두에 둔다.

각 소비자가 원하는 코드를 구현해 내야만 '팔릴' 수 있다.

그게 예술이든, B급이든.


그래도 적어도 한 가지는 같다.

많은 사람이 보유한 시대 감각과 관통하는 콘텐츠라면,

그게 무슨 코드로 짜였든 유행이 되고 스테디셀러가 되고 고전이 된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인용구는 싱숑 작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따왔다.

두 번째 인용구는 제임스 설터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가져왔다.


요 며칠 글을 쓸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몇 밤이고 무엇을 쓸지를 상상하며 잠들었다.


계속 쓸 수 있기를(더 잘 쓰면 좋겠지만, 수영처럼 실력은 제자리걸음이다).

내일도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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