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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Sep 12. 2022

무례해도 첫 편지니까 하는 말

애도 편지 1.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라는 말 대신 부탁할게. 죽지마.

안녕. 그런 일이 있었구나. 반갑다. 

아 반가워할 일은 아니지. 미안. 근데 나도 그랬어.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저버렸어.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었어. 세세한 상황이 다 달라서 별로 도움 될 것 같지는 않은데도 쓴다. 어렸을 때 누가 인터넷에 죽겠다고 올린 글을 보고 길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거든. 지금 비슷한 기분이야. 이걸 읽을지 아닐지 조차 모르지만, 도움은 커녕 더 안 좋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마음. 


스스로에게 다정한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쓰는 거야. 네가 그걸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야.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스스로에게 다정한 말을 해줄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있잖아.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언제나 늘 어떤 상황에서도 다정한 말을 스스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아. 나는 늘 친구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말과 진심을 담은 편지를 건넸지만, 스스로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았거든.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까? 아마 아니겠지. 읽다가 귀찮거나, 힘들거나,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으면 그만 읽어도 괜찮아. 나는 엄마를 잃었어.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을 만나면 늘 제일 먼저 이 이야기를 하곤 해. 어쩌면 조금 무례한 말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말인데, 아주 약간은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조금 이해해주겠거니 하고 우선 뱉고 보는 말이기도 해. 


죽지마.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없지. 그래도 너한테 딱 하나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저 말을 할 거야. 무례하지. 주변에서 저런 말을 해주면 얼마나 그 소리가 의미 없이 귓바퀴 밖으로 흘러 나가는지 알아. 뭘 알면서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지 화가 막 나더라. 그래도 나도 같은 말을 하네. 미안해. 그래도 나는 네가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 너도 고인과 비슷한 선택을 하고 싶어지는 때가 올 수 있을 텐데, 그때 꼭 그 결정을 미뤄. 어쩌면 이미 시도했을 수도 있고, 모르겠네. 자살로 누구를 떠나보내고 나면 내용 없는 공허감이 마음속에 생겨버리는 것 같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맥락 없이 아무 상황에서나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공허감. 나는 날씨가 좋아도 살기 싫고, 날씨가 나빠도 살기 싫던데. 죽고 싶었던 건 아냐, 살기가 귀찮았던 거지. 아 가끔 죽고 싶을 때도 있었어. 잦진 않아. 너는 글쎄 모르겠네. 잦을 수도 아닐 수도, 아주 구체적일 수도 혹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경미한 우울 증세나 무기력일 수도 있겠지. 정신과에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껴질 만큼 심각한 상태일지도 몰라.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선 미루자는 거야. 계획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뭐든 간에 미루자. 이걸 너한테도 꼭 말하고 싶었어. 아직 안 늦었겠지? 


굳이 비슷한 경험이 없어도 마찬가진 거 같아. 가까운 이와의 사별이 아니라 그냥 사랑의 이별, 어떤 사소한 실패에도 죽고 싶을 수도 있잖아.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지만, 솔직히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게 있을 때도 있잖아. 영원히 늘 항상 나보다 소중한 건 아닐지라도 그 순간에 소중했던 무언가를 원치 않게 잃었을 때 사람은 너무 쉽게 무너지는 거 같아. 어쩌면 그렇게 무너지는 게 오히려 강하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스스로의 아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 거니까. 


우울하고, 힘들고, 외롭고, 공허하고,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때, 혹은 무료하고 귀찮아서 그만 살고 싶어질 때, 아니면 지금의 삶이 너무 충분해서 이제는 그만하고 싶을 때(우습지 않니? 난 즐거워도 이젠 충분해서 그만하고 싶더라), 그 생각은 그냥 지나가게 두고 결정과 행동은 미뤘으면 좋겠어. 내 부탁을 네가 들어줄 의무는 당연히 없지. 하지만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네 마음이듯이, 부탁하는 건 내 마음이니까 우선 부탁을 할게.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면 나도 딱히 해줄 말이 없어. 나도 명확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거든. 뭐 내가 엄마가 떠난 후에 힘들었으니까, 남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힘들까 봐 이런 이유도 있긴 한데. 솔직히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너도 알잖아? 치명적인 슬픔과 공허함 속에서 남아있는 누군가들은 잘 떠오르지 않아. 나랑 관련 없는 일 같이 느껴지지. 게다가 남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을 거라는 당연한 가정이 얼마나 잔인하니? 아닐 수도 있는데. 가족이나 친구가 죽고 싶은 이유일 수도 있는데. 또 흔히 이야기하는 더 큰 불행을 극복하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도 별 도움이 안돼. 그 사람들은 그 사람이고, 나는 그 사람이 아닌 걸.

 

아마 세상에 가장 똑똑한 사람들도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을 거야.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데 왜 우리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살아야 할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데 왜 살아야 할까? 시대의 천재들이 답하지 못한 걸 나한테 원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몰라.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부탁이야. 죽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미뤄줬으면 좋겠어. 음… 얼마가 좋을까, 대충 3개월이나 3년 어때? 찾아본 바에 따르면, 자살 유가족은 사별 이후 3개월이 고위험 시기고 그 뒤로는 3년이었던 거 같아. 그 기간은 눈 딱 감고 미루는 거지. 나도 3개월 지난 뒤엔 ‘그래도 버텼군’하고 느끼고, 3년이 지나고 ‘아 내가 살아남았구나’하고 무심코 생각했거든. 물론 3년 뒤에 모든 게 괜찮아진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네가 그걸 기대하지도 않을 거 같아. 상상이 안되지 않아? 3년 뒤에 짠! 하고 괜찮아진다는 게? 솔직히 인간적으로 부탁을 무슨 생애 첫 주택 구매 대출 갚기도 아니고 30년씩 할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3년으로 하자. 


가까운 이를 자살로 떠나보내면, 자살이 하나의 선택지처럼 마음에 남잖아. 어떨 때는 나는 결코 그런 선택을 안 할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솔직히 이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선택지가 마음에 가득 찼었어. 사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선택을 누군가는 한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거든. 사실 그 사람이 원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좀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의 무언가였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그런데도 나는 선택지처럼 남더라. 종종 떠올라.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미루라고 부탁하는 거야. 미루기만 하면 삶은 계속되거든. 어찌어찌 시간이 지나면 떠오르지 않게 되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곧 14년째 엄마 기일이 다가와. 이미 오래전이지? 네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게. 그건 모르는 거니까. 난 괜찮아지고 있는데 우린 상황이 다르니까 혹시 모르잖아. 말을 아끼는 거뿐 네가 안 괜찮아진다는 건 아니야! 그냥 내 부탁을 들어줘. 죽고 싶은 생각이 들면 미뤄. 그래야 괜찮아지는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지. 너도 알다시피 썩 좋은 경험은 아니어서, 두 번 겪고 싶진 않아. 그러니 너는 내게 그런 경험을 다시 겪게 하지 않는 것으로 약속하자. 나도 너랑 약속할게. 알겠지? 


이런 시를 읽었어. 나는 마음에 들었는데, 너도 마음에 들면 좋겠다.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잘 살고 있고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개, 벚꽃고양이, 쥐벼룩, 달팽이, 조랑말, ······
모기, ············ 밍크고래, 가물치, ··················
아직은 돼지, 한때는 개, 그리고 내일은 의자, 
부서진 기타 등등

-  '소셜미디어' 중에서,  김륭,  『나의 머랭 선생님』,  시인의 일요일, 2021


오늘은 아무 꿈꾸지 않고 중간에 깨지도 않고 편안히 자길 바랄게. 

금방 또 안부 전할게.  


2022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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