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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15. 2023

갑상선암이 내게 남긴 것

보통 큰 병에 걸렸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아프고 나니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든가, 욕심을 내려놓고 작은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남한테 들을 땐 울림이 있었는데, 정작 내 일이 되자 잘 공감되지 않는다. 착하기로 유명한 갑상선암에 불과해서인가.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일상을 되찾은 난 수술 전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산다. 분주하고 전전긍긍한 삶을. 


갑상선암은 아직 의학적으로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스트레스나 음주, 흡연처럼 적이 명확하다면 치열하게 맞서 싸우겠는데 이건 그냥 재수가 없어서 걸렸고, 재수가 좋아서 건강검진에서 발견됐다는 식이다. 그러니 이벤트가 끝난 지금은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술을 마시고, 담배는 굳이 새로 배우지 않은 채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산다.


가정을 꾸린 30대 중반의 삶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내 선택은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선택이 아니다. 그 결과를 혼자 감당해야 할 땐 주변에서 말려도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다. 휴학도 하고, 회사도 관두고, 인연도 끊었다. 지금은 다르다. 내 선택은 나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시간에 거창한 미래를 계획할 수밖에 없다. 일상의 선택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부장님이 술을 먹자고 할 때 내가 좋고 싫고는 아무 상관없다. 대답하기 전까지 약 1.5초 동안, 참석했을 때 내가 얻게 될 이익과 거절했을 때 감당해야 할 불이익을 면밀히 따져본다. 그러니까, 참석해서 승진에 도움 될 관계를 다져놓는 게 좋을지, 그 시간에 운동과 자기계발을 하는 게 나을지 저울질하는 거다. 보통 세 번 중 한 번은 참석하고, 두 번은 거절한다. 돈 잘 버는 아빠도 되고 싶고, 몸과 뇌가 건강한 아빠도 되고 싶으니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다.


회사까지 걸어서 출근할지 지하철을 탈지, 점심을 누구랑 먹을지, 여가시간에 무얼 할지도 일일이 계산하고 있으니 피곤하기 짝이 없다. 그냥 고민 없이 교통비를 플렉스하고, 점심은 김애란 소설을 읽으며 혼자 먹고, 여가시간엔 가만히 멍 때리면 좋겠는데, 뭐 대단한 인생이라고 매사에 틈을 메꾸려 안달일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일상이어도 괜찮은 건, 내가 불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게 불행하다며 첫 직장을 관둘 때 아버지가 그러셨다. 산다는 건 원래 고통이 70% 이상이라고. 매형은 그랬다. 본인은 지금 눈앞의 물컵을 옮기는 선택조차 아내와 아이들, 그러니까 누나와 조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두려운데, 나 역시 내 선택의 무게감을 실감하는 날이 올 거라고.


아버지는 그때 내가 고통과 불행을 구분하고, 고통은 삶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길 바랐던 것 같다. 매형은 내가 언젠가 결혼하면 돈 많이 주고 안정적인 직장을 관둔 걸 후회하리라는 걸 내다본 게 틀림없다. 지금 난 가족에게 더 많은 걸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니까. 그리고 남은 인생도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많을 거라고 담담히 인정하게 되었으니, 그때 당신들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해주었구나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니 갑상선암이 내게 남긴 건, 고통은 결국엔 지나간다는 흔한 깨달음이다. 수술의 고통도, 회사와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도 나를 죽이진 못하니, 내가 할 일은 진짜 불행을 경계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못나게 여기지 않고, 세상의 잣대에 비추어 우리 가족의 가치를 재단하지 않는 일이다. 그 노력이 모이고 모이면 언젠가 인생을 돌아보며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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