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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택 Jun 09. 2018

166. 멈춤, 사람, 쿠스코

2017년 10월 9~25일, 여행 383~399일 차, 페루 쿠스코

마추픽추 하산 중에 부상당한 다리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돌아오는 길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식은 땀이 날 정도였고, 돌아와서도 당일 날에는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실은 마추픽추를 보고 나서는 바로 우유니로 이동하려고 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면 반달이 차기 전에 별을 보기 좋은 상황의 우유니로 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상당한 다리는 나를 쿠스코에 멈춰버리게 만들었다. 그 핑계로 멈춰있던 쿠스코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시간을 보내며 내 발은 묶이기 시작했다.

페루 축구경기가 있던 날. 묶여버리면 이런 것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멈춤의 핑계

걷는 것이 불가능 했다. 장을 보러 가는 것 조차 힘이 들었으니까. 시작은 걷지 못해서 멈추게 된 쿠스코였지만 점점 다른 핑계거리들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지내던 숙소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걷질 못하니 그 언덕 위 숙소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를 멈추게 했던 더 큰 이유는 그 언덕 위 숙소의 모습이었다. 그네의자가 자리잡고 있던 앞마당, Naiia라 불리는 엄마강아지와 쪼르르 따라다니는 아기 강아지들, 그리고 친절한 호스트였던 Natalya까지. 

호스텔로 알고 갔던 숙소는 사실상 거의 홈스테이였고, 나는 거의 그 집에서 1/3 쯤은 직원 행세를 대신하면서 지내야 했다. 다리가 아프니 먼 식당이나 시장도 갈 수가 없었으니 밥은 숙소에서 해결할 수 밖에. 나는 그 곳에서 거의 'KOREAN CHEF'로 불리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한식의 한을 풀어버렸다. 자주 해먹는 제육볶음이나 콜라찜닭으로 시작해서, 파키스탄에서 쑥갓으로 대체했던 김치를 제대로 담가보기도 했고, 고추장을 담그고 갈비찜도 해서 먹어보았다! 다리로 시작했던 멈춤의 핑계는 어쩌면 한식으로 끝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1 : Nayona

그 홈스테이에서 나와 함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이카에서 부터 졸지에(?) 나를 따라왔던 Nayona였다. 처음에는 이카에서 만들어준 나의 (우꾼의 마지막 유품이었던)사천짜장에 감동한 그녀는 '오빠를 따라가면 한식을 먹을 것 같았다'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따라왔었다. 처음에는 그 높은 언덕에 있던 숙소때문에 불평하는 듯 싶었지만... Nayona 역시도 사람도 없고 한적한 숙소 덕에 그냥 푹 빠지게 되었따. 물론 '장난 반'처럼 나의 한식 열전에 영향을 받아 덕분에 함께 맛있는 한식을 먹기는 했지만... Nayona와는 여유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사소한 얘기부터 개인적인 몇 몇 이야기 가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있었다. 

Nayona와 함께 Natalya의 집에서 묵었던 기억은 페루 여행 아니 남미 여행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일 것이다.

Nayona는 자신이 아직 2000년대에 살고 있던 아이라고 소개했다. 그때의 추억과 기억들 때문에 그 당시에 방영하던 드라마나 매체를 보며 지내는데, 그것이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나를 떠내 보내던 Nayona는 나를 그리워 하는 건지 한식을 그리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Nayona 개인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회사에서 커리어를 올리고 있으면서 여행 하던 때를 그리는 나를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세계일주를 하고 있으면서도 일로 커리어를 올리고 있던 때의 나를 떠올리기도 했다.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시기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누구나 그러는 거니까, 괜찮아'라고 위로 하기는 했었다. 위로가 되는 말일까, 그냥 허공에 하는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봤던 한 웹툰에 등장한 대사가 Nayona와 나눴던 그 날의 대화를 관통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그 사람의 인생의 총합'을 말하는 것이 아닌, '가장 자기다웠던 어느 때의 자신'을 말하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나는 어느 때의 나인가?

나보다 어렸던 그러나 생각이 깊었던 그 친구와의 대화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쿠스코에서 그 예쁜 호스텔에서 보낸 Nayona와의 시간은 사소한듯 소중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참고로 그녀는 아직도 쿠스코에 있다.


사람 2 : SHINAE

생각해 보니 해발 5000m나 되는 비니쿤카를 간 이야기가 빠졌다. 신애씨랑 같이 갔었는데...

또 한 명의 애증(?)의 인물을 꼽자면 SHINAE다.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곳은 쿠스코가 아니라 Nayona를 만났던 이카보다도 훨씬 더 전인 와라즈이다. 내가 와라즈에 도착해서 투어를 처음 이용해서 다녀왔었던 파스토루리 빙하에 갔었을 때 처음 만났던 친구이다. 한 번만 보고 못 볼 줄 알았던 이 친구는 와라즈에 있는 동안 민우와 여훈이를 만나 69호수에 갔을 때에도, 와라즈를 떠나 리마로 갔을 때에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페루 여행에서 가장 많은 도시에서 나랑 일정을 함께한 친구랄까. 그런데 이 친구, 우여곡절이 일정에 비하면 꽤 많다. 일단 고산지대에서는 고산 증세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고산 증세라는 것이 굉장히 상대적인 부분이라 내가 느낄 수는 없었지만 SHINAE는 꽤 힘들었을 것이다. 이게 나한테 애증이 된 이유는, SHINAE의 페이스를 맞춰주려고 함꼐 움직이다 보니 나도 나 나름대로 느리게 움직여야 했다. 나 혼자 움직였다면 보고 싶은 것들을 제시간에 봤을텐데 아무래도 보조를 맞춰 움직이다 보니 그러지 못한 부분은 있었지만 본디 등산이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느리게 올라간 만큼 또 천천히 산을 즐길 수 있어 나는 괜찮았는데 당사자에게는 나름의 부담이었으리라. 그 외에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서로 본의아니게 페루 여행의 보이지 않는 동반자 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쿠스코, 그 친구와는 무지개 산으로 불리는 비니쿤카를 또 한 번 같이 갔고 역시나 페이스를 맞추느라 맑은 날씨를 함꼐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르는 길, 내리는 길 심심하지 않게 서로 도와가며 오르고 내릴 수 있어 즐거웠다. 하지만 진정한 애환은 따로 있었으니, 쿠스코를 떠나던 날 핸드폰을 잃어 버린 것. 나처럼 사진기를 갖고 있는 사람에겐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보통 사람에게 핸드폰은 메신저이자, 정보를 찾는 디바이스이자 사진기이기 때문에 문제가 크다. 애증의 SHINAE에게 도움이 되고자 내가 분실을 대비해서 가져왔던 예비 폰을 주었다. 워낙 성능이 오래된 핸드폰이라 큰 도움이 안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당장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야 했으니까. 뭔가 페루 여행을 함께한 직간접적 위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나의 고물 폰을 들고 여행을 이어갔다. 현재 그녀는 칠레로 넘어가 아타카마를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고 있다고.


멈춰 버린 발, 다시 걷는 걸음

그 외에도 나의 발을 묶은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묵고 있던 호스트의 Natalya의 대대적인 Lomo Saltado 파티, 잠깐이지만 함께 머문 독일인 커플과의 한국/독일 음식 교류, Nayona가 데려온 한국인들과 함께한 라면 파티, SHINAE를 비롯해 와라즈에서 함께 했던 다른 친구 까지 함께한 음식 대접, 혼자서 김치 담그기에 도전하기 등. 물론 대부분이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아무튼 묶여버리고 멈춰버린 발을 다시 움직이는 데에는 상당한 계획과 노력이 필요했다. 페루 이후의 동선에 대해 고민해야 했고, 곧 다가올 귀국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다. 게을러진 멘탈은 쉽게 잡히지를 않았다. 일단 가까운 페루 다음 국가인 볼리비아 일정이 정리되면 바로 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Natalya는 곧 자기 호스텔 이층에 오픈할 바에 함께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랬다간 아예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체크인 한 지 2주만에 나는 쿠스코 숙소를 나설 수 있었다. Nayona와 호스트 Natalya와 섭섭한 인사와 소정의 선물을 남긴 채. 뭔가 다시 새 여행을 출발하는 기분이었다. 나, 남미여행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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