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6~29일, 여행 400~403일 차, 볼리비아
페루는 다른 나라보다 특히 긴 기간 체류했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조우, 그리고 쿠스코에서의 생활에 가깝던 일정들은 ‘머물며 돌아보는 여행’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리듬의 여행은 나같이 치고 나가야 하는, 제한된 재정과 일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겐 쥐약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소금사막이 기다리는 곳인 볼리비아로 이동하는 것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여행에서의 염증이 여행을 마무리해 나가는 시점에서 오니 이것 자체도 영 반갑지도 않았으니까
쿠스코를 떠나 향한 목적지는 볼리비아의 실질적 수도로 알려진 라파즈였다. 다만, 바로가는 여정의 티켓이 쉽게 구해지지도 않거니와 중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로 알려진 티티카카 호가 있어 해당 도시에 잠깐 내려 티티카카 호수를 본 뒤 라파즈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티티카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 양국에 걸쳐있는 굉장히 큰 규모의 호수이며, 대부분의 페루, 볼리비아 지역들이 그렇듯 고원에 위치하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고 대부분의 안내서가 말한다. 주로 많은 여행객들은 볼리비아 측에 걸쳐있는 티티카카 호를 보기 위해 볼리비아의 도시인 코파카바나를 가는데 페루, 볼리비아 전체적인 물가에 비해 비싼 물가를 자랑하기에 다른 여행객들이 잘 가지 않는 페루 측의 티티카카 호수 마을인 푸노를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쿠스코에서 8시간 정도 이동하면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도시이자 티티카카를 안고 있는 푸노에 도착한다. 나는 이 곳에서 시간과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오전에 시작해 오후에 끝나는 반일투어를 한 뒤 라파즈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 곳에서 진행되는 투어가 가지는 독특한 점이라면 과거 티티카카 호수에 자리잡았던 잉카시대 문명인들이 그 세대를 이오면서 지낸 주거양식과 문화양식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투어는 배를 이용해 이동한다.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갈대지대를 따라 배를타고 들어가면 독특한 형태의 배들을 먼저 만나게 된다. 갈대를 엮어 만든 배인데 견고하고 가벼워 손으로 밀어도 죽죽 나가는 배다. 과거부터 이용해왔다고 하니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면 수상가옥이 있는 마을에 내리는데, 재밌는 것은 발이 닿는 곳은 땅이 아니라 짚더미다.
이윽고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되는데, 이러한 수상가옥 마을들은 과거 잉카 시대 즈음부터 쭉 존재했고 갈대의 일종과도 같은 지푸라기더미를 블록처럼 묶고 서로 이어 일종의 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또 짚으로 집을 지어 생활한다고... 그래서 필요하면 마을을 옮기는 것도 가능해서 마을사람들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땅을 끊어버린다는 농담까지 던진다(...).
짚으로 지은 집이야 한국에서도 과거 초가집이 있었으니 주거형태에 대한 신기함은 없지만 짚 위에서 생활해 나간다는 것 자체가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직까지도 이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전기와 같은 편의시설은 태양광 발전을 이용해 전기를 모은다고 한다. 짧지만 신기함이 가득한 시간이 마무리 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페루 국경을 너어가는데 몸상태가 영 좋질 않다. 아마 푸노 시장에서 먹은 밥이 문제가 있었는 듯 했다. 한동안 물갈이 없다 했더니... 그 아픈 가운데 창 밖을 슬며시 보는데 볼리비아에서 티티카카 호수가 보였다. 보기 전까지만 해도 ‘푸노만 봐도 티티카카는 충분하지’라고 생각한 내 자신을 반성할 정도로 엄청 아름다웠고, 나는 그 아름다움만 기억한 채 끙끙 앓으며 볼리비아로 향했다.
푸노에서 출발한 버스가 나는 다음 날 아침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라파즈에 오게 되어 날을 넘기지 않은 저녁에 도착했다.. 뭘 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지만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 그 다음날 하루까지 쉬어버리고 움직이기로 했다. 라파즈가 큰 도시기는 하지만 배낭여행자가 무언가를 보러갈 만한 곳이 많은 도시는 아니라 몇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는데 돈이 가장 적게 드는 선택지인 달의 계곡을 가보기로 했다.
달의 표면처럶 생겼다고 알려진 그 곳은 사실, 이 곳 라파즈에 있는 것 보다 칠레 북부 사막인 아타카마에 있는 곳이 더욱 유명하고 거대하다. 마침 난 또 돈이 없어서 아타카마를 가지 않았으므로 좋은 선택지였다고 볼 수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최근에 여행이 막바지를 향하다보니 돈이 떨어져 가다보니 어떤 선택에 대한 자율성이 많이 침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돈을 아껴두면 왠지 내가 남미에서 가장 보고 싶어하던 곳(!)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일단은 조금 절약해두기로 했다. 어쨌든, 라파즈의 가장 큰 광장 중 하나인 산 프랑시스코 광장에서 콜렉티보를 타고 약 40분 정도 이동하면 달의 계곡에 도착하게 된다.
규모가 작다고는 해도 걸어서 한 시간 여 가량 둘러볼 수 있는 이 곳은, 처음 언뜻 보면 미 서부에서 봤던 브라이스 캐년을 떠올리게도 하는 것 같다. 입구에서 다른 가이드 투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말을 귀동냥해보니 미 서부의 협곡들과는 생성원리가 조금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다르다고 한 것만 기억에 남고 어떻게 다르다고 하는지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걸 보면 또 투어가 그만큼의 값어치를 한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시간도 많으니 가장 길게 돈다는 1시간짜리 코스를 돌아보기로 한다.
칠레 아타카마의 그 것도 그렇지만, 이 곳이 달 표면 같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떤 상상력으로 여기가 달 표면 같다고 이름을 붙였는지가 참 궁금하다. 옛날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침강된 지역은 들쭉 날죽 하늘을 향해 날카로이 서있다. 달보다는 어떤 요새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고 터키 카파도키아의 그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기한 풍경이었다. 왜냐면 주변에 그런 지형은 딱 거기뿐이고 나머진 다 거대한 돌산들이기 때문. 자연의 신비인지 일부만 남기고 개발한 사람들의 이기심일지 모를 묘한 감정을 남기고 달의 계곡을 떠나 나왔다.
숙소가 위치한 시내로 오니 도로를 차단하고 축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미나라들 대부분이 스페인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카톨릭을 믿고 있기에 특정 성인의 탄생일이나 사망일을 기념일처럼 여기는데 그날도 어떤 성인을 기리는 날이라고 했었다. 페루와는 또 다른 전통의상을 입으며 행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돌아가는 길에는 오락실을 발견했다. 이날 되려 달의 계곡만큼 재밌었던 것은 시내에서 오락실을 찾은 것이다. 오락실이 아무것도 아닌 곳이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임인 펌프(!)가 남미에서 유명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역시나... 동네 오락실에서 엄청난 고수들의 플레이들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 잘하는 여자플레이어도... 역시 세계 랭킹은 우리나라에겐 밀린다고 해도 우리나라보다 펌프의 인기가 있는 남미의 클래스를 확인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떠나기 전 날에는 라파즈 시내를 짧게 둘러보고 밤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몸이 아파서 였는지는 몰라도 움직이는 것이 쉽지가 않으니 다른 곳들으 둘러보는 것들이 영 쉽지 않았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전망대였던 킬리킬리는 안전한, 아니 안전하다기보다는 인적이 아주 드물어서 고요한 곳이었다.
나는 앞서 남미의 야경을 보고타에서 본 적이 있기에 애초에 기대감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야경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남미는 백열전구를 이용하는 가로등이 아직도 많아서 노란 빛을 띄는 풍경이 주요한 특징인데, 이 것은 일전의 보고타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 드는 이 생각이 풍경이 비슷해서 드는 생각인지, 내 여행이 자체가 일상이 되며 염증이 생기니 부르는 생각인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많은 이들은 일상의 탈출을 위해 여행을 꿈꾸는데, 그 일상이 여행이 된다고 느껴지면 무엇으로 탈출해야 하는가.
몸이 안좋으니 염증이 오고, 염증이 오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던 라파즈의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