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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 멀리 반짝이는 별 Aug 07. 2022

섹스어필과 지성의 양면성

04. 샤론 스톤 Sharon Stone

<원초적 본능>으로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여배우 샤론 스톤.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동시상영관이 존재하던 90년대 초 어느 날, 겨우 국민학생에 불과한 남자아이들이 길거리에 붙은 영화 포스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은 주요 상영이 종료된 뒤 거의 뒤처리 수준으로 삼류 극장에 걸려있던 <원초적 본능>의 포스터였다.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호기심에 엿들은 부모 간의 대화를 자신들의 무용담으로 뒤바꾸어 떠들어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제목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원초적 본능>은 최고 화제작이었다. 극장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고 영화 포스터만 봐도 비위가 상했던(?) 평범한 어린이였던 나도,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을 보면 그게 어떤 영화인지 알았다. 그 정도로 <원초적 본능>은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됐지만 모두가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은 자극적인 장면들과 선정성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만듦새가 뛰어난 스릴러물이었다. <로보캅(RoboCop)>과 <토탈리콜(Total Recall)>을 연이어 흥행시킨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은 조 에스터하스의 자극적인 각본을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 영화로 완성시켰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마이클 더글라스가 강도 높은 노출씬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심한 이유가 달성된 셈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 한 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은 따로 있었다. 샤론 스톤이다. 관객들에게는 낯선 여배우였기에 신인이나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지만, 샤론 스톤은 이미 십수년을 할리우드 B급 영화들에 출연하고 있었다. 뛰어난 매력을 가진 그녀가 왜 이제야 사람들 눈에 띄었는지 신기하다 할 정도로 <원초적 본능>에서 스톤은 그야말로 만개했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만난 1992년, 그녀 나이 34살이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기 전까지 샤론 스톤의 커리어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데뷔 초기에 우디 알렌의 <스타더스트 메모리즈(Stardust Memories)>(1980)에서 기차의 예쁜 소녀 역할로 등장한 걸 제외하면 주로 TV물이나 B급 영화에만 출연했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의문스러운 아내로 캐스팅된 그녀는 예쁜 외모, 섹시함 등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 활용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를 소화했다. 의외성이라면 선한 캐릭터인 레이첼 티코틴에 맞서 억센 액션을 보여준 것이랄까. 이 영화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2년 뒤 폴 버호벤의 <원초적 본능>에 출연할 수 있었다.      


<원초적 본능>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4,900만 달러 남짓한 예산으로 완성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샤론 스톤의 몸값은 덩달아 상승했다. 50만 달러에 그쳤던 출연료는 다음 영화에서 250만 달러로 5배나 상승했다. 영화에서 보여준 스톤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오갔는데, 최악의 연기자에게 수여하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와 반대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지명됐다.     

이미지만 소비됐던 샤론 스톤. <슬리버> <마지막 연인> <스페셜리스트> <디아볼릭>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어떤 배우가 특정 장르의 이미지로 스타덤에 오르면 향후 자신의 커리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고민하게 된다. 영화 기획자, 제작자들은 스타의 기존 이미지를 활용한 영화 출연을 권유하며, 배우에게는 그런 류의 시나리오만 쏟아진다. 샤론 스톤도 한동안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관음증에 관한 필립 노이스의 스릴러 <슬리버(Sliver)>나 실베스터 스탤론과의 만남으로 화제가 된 <스페셜리스트(The Specialist)>는 샤론 스톤의 섹시한 이미지를 중점적으로 차용했고, 결과적으로 악평을 받았다. 리차드 기어 주연의 <마지막 연인(Intersection)>에서 현모양처로 변신했지만 영화가 처참했고 그녀의 연기도 주목받지 못했다. 이 세 편의 영화로 샤론 스톤은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 줄줄이 지명됐다.      


결정적 순간: 카지노(Casino)(1995)   

1995년, 샤론 스톤의 커리어는 전환점을 맞았다. 마틴 스콜세지는 자신의 페르소나 로버트 드니로, 조 페시와 함께 라스베가스에 대한 잔혹한 드라마 <카지노(Casino)>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냉철한 카지노 운영자와 뒤를 봐주는 마피아, 포주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여자 사기꾼 ‘진저’가 주요 배역이었다. 당연히 앞의 두 캐릭터는 로버트 드니로와 조 페시의 몫이었고, 여성 캐릭터는 캐스팅이 필요했다. 당시 잘 나가던 미셸 파이퍼는 <스카페이스(Scarface)>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했다. 멜라니 그리피스, 니콜 키드만 등이 거론되었고, 마돈나가 캐스팅될 것 같다는 뉴스도 나돌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이 역할은 샤론 스톤에게 돌아갔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캐스팅되어야 함을 감독에게 설득한 결과였다.      

영화 <카지노>(1995)의 오리지널 포스터.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샤론 스톤이 제대로 연기를 펼친 최초의 영화였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이미지만 소비했던 기존 출연작들과 달리 이 영화는 스톤에게 캐릭터의 감정, 판단 등을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상대 배우가 로버트 드니로였다. 그는 100년이 넘는 영화사(史)를 통틀어 영화제 트로피, 비평가들의 평가 등이 큰 의미가 없는, 이미 연기로 전설이 된 배우였다. 샤론 스톤은 자신의 연기 코치에게 “로버트 드니로와 작업하기 충분할 정도로 연기하고 싶다”라 말했을 정도로 ‘진저’라는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하고 싶어했다.     


<카지노>의 진저라는 캐릭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력을 가진 배역이었다. 여느 여성 캐릭터들과 달리 복합적인 성향에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어서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했다. 또한 역대 마틴 스콜세지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 중 가장 매력적이라 할 정도로 비중이 높고 존재감이 컸다. ‘진저’는 라스베가스 카지노를 돌며 편법을 써서 돈을 벌어들이는 캐릭터로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모두를 사로잡는 인물이다. 철저히 사업에만 관심을 보이는 냉철한 샘 로스틴(로버트 드니로 분)까지도 그녀에게 반해 온갖 보석과 돈으로 마음을 사서 결혼할 정도다. 하지만 이 완벽한 삶에 한 가지 오점은, 어린 나이에 라스베가스에서 창녀로 활동했던 전력, 그리고 그 과거의 유일한 끈인 포주 레스터(제임스 우즈 분)와의 관계다. 진저는 남편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부를 레스터에게 갖다바치고 그를 몰래 보살핀다. 이는 그녀의 삶과 주변인의 삶을 파멸시키는 시발점이 된다. 스콜세지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들의 세계에서 병풍처럼 다뤄지거나 그들의 조력자 정도로 그려졌다(그래서 여성을 너무 대충 다룬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 진저는 그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 중 가장 독립적이고 극 서사에 영향을 미친 캐릭터였다.      


샤론 스톤은 이 ‘진저’라는 캐릭터를 썩 잘 소화했다. 기가 막히게 훌륭했다는 표현은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들에게나 붙여줘야 할테니, 미안하지만 이 표현은 아끼겠다. 만약 샤론 스톤이 그 같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면 이후의 커리어는 달라졌을 것이다. 다만 스톤은 그녀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어디서든 눈에 띄는 아름다움으로 라스베가스에서 홀로 살아남은 억센 강인함과 자신의 과거에 발목 잡혀 끌려가는 연약함까지 다소 넓은 범주의 성격을 고루 보여주었다. 남편과의 관계에 금이 가고, 신뢰를 잃어버려 마약에 손을 대면서 마피아, FBI 등과 대립하는 혼란스러운 막바지까지 스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이 연기는 여느 여배우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수준으로 지금도 여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손에 꼽을 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 연기를 논의 중인 샤론 스톤의 모습.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그 공을 인정받아 샤론 스톤은 그 해 엠마 스톤(센스 앤 센서빌리티), 메릴 스트립(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을 물리치고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스스로도 수상 소감에서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 해 후보자들이 쟁쟁했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노력으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 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카지노>는 얼마 전까지도 IMDB 역대 순위 250에 포함된 영화였고, 스콜세지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걸작이다. 그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고 배우로서 최상의 것을 끌어낸 노력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샤론 스톤은 우리에게 늘 <원초적 본능>으로 기억되는 여배우고, 2000년대 들어 그 후속작에 출연했을 정도로 이후 커리어는 주목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었고 배우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모멘텀이 존재했다. 바로 그 때가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 트래멜이 아닌, <카지노>의 진저 맥케나였을 때다.     


<카지노>에서 포주 레스터로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제임스 우즈는 아이큐 184를 자랑하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똑똑한 배우로 유명하다. <카지노> 이후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는데, 우즈는 샤론 스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영화업계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들 중 한 사람.” 실제로 스톤의 지능 역시 154로 매우 높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재 그녀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스크린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보톡스나 필러를 맞아 젊음을 안타깝게 부여잡는 타 여배우들에 비해 그녀는 자신의 주름살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샤론 스톤은 우리에게 섹시하게 다가왔지만 알고 보면 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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