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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은 Oct 25. 2021

동행의 조건

"인생샷 찍어 드립니다."

"사진 알바 경험 있어요."


미국 여행 커뮤니티에서는 '동행 구함' 게시판이 가장 핫하다. 장소와 시간만 맞으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만나 식사를 하고 숙소나 렌터카를 함께 쓴다. 지구 반대편에서 짝을 찾는 이들의 구애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게시판의 'NEW'도 사라질 줄 모른다.


동행을 구하기 위한 최고의 스펙은 사진 찍는 기술이다. 사진 관련 경력이 어느 정도인지만 잘 기술해도 동행을 구할 수 있다. 노스펙 취업에 버금가는 노취향 동행이다.


사진 찍는 기술로만 동행을 구한다면 동행봇은 어떨까?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느니 너무 많이 걸어 다리가 퉁퉁 부었다느니 하는 소리 없다. 수평과 3분할 법칙에 맞게 사진을 찍어 주고, 27개 국어 능통에 현지 가이드까지. 심지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잔다!


그런데 동행봇에게 나도 최고의 동행인일까?


2013년 여름, 입사 동기 언니랑 유럽에 갔다. 런던에서 대판 싸우고 파리에서 화해했다. 언니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을 척척 걸고, 나는 지도나 메뉴판을 술술 읽는다. 화해하지 않으면 둘 다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는 상황이었다. 런던에 계속 머무는 일정이었다면 따로 잘 놀았을 것이다. 다시 낯선 땅에 떨어지니 막상 기댈 곳이 옆 사람밖에 없었다.


동행봇이랑 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숙소에서 밥도 못 먹고 구경도 못 하고 찌그러져 있을 때, 동행봇은 파리지앵봇이 되어 샹젤리제 거리를 활보했을까? 내가 숙소에서 창밖 풍경만 찍으며 싸이월드 감성을 뽐내고 있을 때, 동행봇은 민박 주인이 경고한 위험 지역에서 콧방귀를 뀌며 인증샷을 찍었을까? 그것도 셀프로!


언니가 이번엔 일본에 가자고 한다. 자기가 이제는 지도를 볼 줄 안다며, 이제 나한테 안 물어보겠다며.


아니야 언니, 지도 못 봐도 돼. 영원히 보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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