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링핀 Sep 22. 2017

공주와 왕

[1막]  

먼 옛날, 작은 땅을 가진 한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는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태어날 적만 해도 백성들과 신하들의 축복과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새 점차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결국 사라져서 공주가 병으로 죽었다 거나 무능한 왕 때문에 다른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등의 소문만 무성했다.  




[2막]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한 나라에 왕으로 서도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서도 엉망 이였던 왕은 왕비와 백성을 내팽개친 채 여성들과 밤새 유흥을 즐기며 궁궐의 사람들을 죽이기 일쑤였다.  

공주가 5살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참다못한 왕비는 공주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남편에게 서러움이 뒤섞여 언성을 높이고 말았고 분노에 휩싸인 왕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의 아내를 칼로 베여 죽여 버리고 말았다.   

왕비에 품 속에서 칼부림을 피한 공주는 어머니의 피를 뒤집어쓴 채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항상 사람은 무언가를 저지른 후에 깨닫는 걸까?  

왕은 피범벅이 된 궁궐 바닥에 피로 물든 칼을 떨구었다.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떨구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몇몇의 신하들과 궁녀들은 더 이상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피와 술과 여자에 눈이 먼 멍청한 남자일 뿐이었다.  

왕은 그대로 궁궐 밖까지 뛰쳐나갔지만 말리거나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주 또한 달라졌다.  

죽어 버린 눈빛과 생기가 사라진 입술은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공주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졌다.  

한 동안 공주는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변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10년이 지난 뒤, 짧은 시간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았고 궁궐의 신하들은 더 이상 죽어 나가지 않았다. 나라에 범죄자는 없고 신분이나 직업에 귀천이 사라지니 모두가 평등한 혜택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하지만 공주는 달랐다.  

왕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 방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자신의 몸에 묻은 어머니의 피를 지워내며.  

왕이라고 무관심했던 것만은 아니다.  

공주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 애썼지만 마음이 굳게 닫힌 공주는 왕을 볼 때마다 기겁하며 몸을 웅크린 채 발작을 일으키거나 기절하기 일쑤였다.  

마음이 아팠던 왕은 그 이후로 매일마다 공주의 시녀를 불러 공주의 상태를 묻고 매년 공주의 생일 때마다 시녀에게 선물을 대신 전해 주었고 새로운 왕비를 맞지 않았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갇혀버린 채 사람들과 단절된 공주는 기억에서 잊혀지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었다.  




[3막]  

격년으로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축제가 있었다.  

최초에는 귀족이 평민의 옷을 입고 평민은 천민의 옷을 입으며 천민은 귀족의 옷을 입으며 신분에 차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쉬고 먹고 마시고 노는,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운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며 왕도 예외 없이 그 날만큼은 최소한의 신하만 거느린 채 평민처럼 지내는 게 전통 이였으나 현재는 신분과 직업의 귀천이 많이 사라진 탓에 사람들에게는 하루 동안 일은 내팽개치고 신나게 노는 날로 통하였다.  

길거리에는 사람들과 음악소리로 가득 차 모두 흥겹게 춤을 추고 몸을 부딪치고 음식을 나누며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로 뒤덮였다.   

왕도 빠지지 않고 사람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평범한 옷을 입은 채 아무 생각 않은 채 그 분위기에 만끽돼 있던 참 이였다.  

“공주다.”  

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여러 사람에게 울려 퍼지고 다시 반복되었다.  

“공주다.” “공주다.” “공주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으로 쏠렸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평범한 옷을 입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 듯 크게 대조되었고 사람들은 공주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공주란 말을 들은 왕은 자신이 나설 수 없기에 조심스레 공주가 맞는 지만 확인하러 목소리의 출처지로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웅성대는 사람들 뒤편에서 발꿈치를 든 채 공주가 맞는지 확인하던 찰나에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웠던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마주친 공주의 눈이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왕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놀랍고 믿기지 않았던 왕은 사람들을 뚫고 공주의 앞으로 나섰다.  

“공주야……”  

공주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답했다.  

자신을 보며 기겁하던 공주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앞에 서있다니.  

왕은 공주의 코앞까지 다가섰고 공주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무언가를 꺼내선 순식간에 왕에게 쑥 내밀었다.   

그 반짝이며 날카롭던 은색 물체는 순식간에 왕의 복부로 깊이 빨려 들어가 검붉어졌고 어느새 길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시간이 멈춘 듯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공주는 칼날을 비틀어 새차게 뽑아냈고 하늘엔 핏줄기가 솟아났으며 왕은 비참하게 고꾸라졌다.  

그제야 신하들은 말이 없는 왕에게 달려왔고, 공주는 다시 한번 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