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피니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수정 Nov 03. 2024

나는 복어

이력을 부풀리는 게 자기홍보라구?

#복어 불나방 배짱이 


클래식 전공자들의 프로필은 보면 볼수록 휘황찬란하다       어디 유학에 누구 사사에 최우등졸업에 누군가의 극찬을 받고 어디서는 기립 박수를 받았단다. 그런데 때론 무대 위에서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이런 말까지 써야 하나 싶기도 하고.


짝꿍이가 유학생활을 하고 오면서 대략  대단한 이력에서 찐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웠다. 일단 학교명에서 수준이 파악되는데 유학 준비를 하면서 학교순위를  수밖에 없다. 대충 뉴욕시 강남구 청담대학교 이런 곳은 학원일 가능성도 높고 동유럽 일부 학교는 돈만 주면 유학생을 받는 곳도 많다. 그리고 미국만 해도 코스가 여러개인데 유학생들은 본인이 입시를 치뤘고  학교의 커리큘럼을 꿰기 때문에 정규학위과정인지도 확인이 된다.


누구 사사는 원데이클래스인지 학교에서 한두학기 배운건지 캠프서 만난건지  제자인지는 같은 업계에선 대략 안다. ‘극찬기립박수  말하긴 애매한데 서양 애들은 워낙 입바른 칭찬이 습관화 되어있단다. 증명하기도 어렵잖아. 겉으론 맨날 브라보 하면서 걔들이 보기엔 동양애들이 신기하다  정도의 의미일 , 실제 유색인종에게 종신교수 같은 주요한 자리를 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졸업 하고  돌아가면  불법체류자. 00교수라는 건 왠만하면 강사.


뭐 출판업계에서도 이력부풀리기는 빈번하다. 요새 책은 정말 마음만 먹으면 검증 없이 누구나 내기 때문이다. 내 책꽃이에도 전직 교장, 부시장 등의 에세이가 펴보지도 않은 채 꽂혀있다. 이력부풀리기는 특히 정치인들의 일대기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책은 앞에 자신의 사진이 똭 붙어있고 무지하게 두껍다. 이야기를 벼리하지 않고 투머치스피커, 태생이 정치인이었음을 부각한다. 그리고 맨 뒤에는 위인전도 아니면서 연표가 서너장 붙어 징그럽다. 책은 퀄리티에 비해 턱없이 비싼데 이게 페이백으로 사용된다는 얘기가 있다.


여기에 인풀루언서가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거나 특정분야의 전문가들이 명함처럼  출판을 하기도 한다. 나도 두번째 책을   출판사에서 설득한 지점이기도 하다. 책을 냈다는   분야에 어느정도 고민과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거니까. 여튼 책을 내는 목적은 다양해졌고, 독자로서 좋은 책을 고르려면 출판사의 규모나 전문성 목차 등등등 여러가지 고려할 수밖에 없다.


듣기론 한 군데서 책을 연달아 낸 것도 의뭉스럽단다. 자비출판일 가능성이 크다고. 큰 출판사일 수록 신뢰가 높지만, 그렇다고 독립출판물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흙 속의 진주가 발견되기도 한다.


추천사, 그것도 아주 재밋다. 유명인들의 추천을 받은 책들 중에는 원고를 읽어보지도 않고  티를 은근히 낸다. “(읽어보진 않았지만)애는 착해요. 또는 평소에 성실해요수준. 마치 추천자들이 자기방어를  것처럼. 이것도 일부는 과 인맥.


원고를 읽고 쓴 찐 추천사는 책을 읽기 전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책을 읽고나서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니 세상을 바꿔줄꺼야’ ‘글이 어마어마해’ 라며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 생각나는 건 최재천 교수님의 <휴먼카인드> 추천사가 있다. 누군지 기억나진 않는데 김영하 소설 <작별인사>의 추천사는 처음부터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책을 읽고 나서 깨달았다. 아! 내가 놓친게 있구나. 추천사를 보고 산 책이 있는데 양다솔작가의 에세이에 붙인 이슬아 추천사. 내용은 대략 ‘이 친구를 만나고 오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 추천사를 보고 구입해 한때 최애책이 되었다. 끝내주는 이야기꾼이다.


쨋든 복어처럼 자신의 이력을 부풀리는 행위는 아주 일상적이 되었다. 복어처럼 사는게 어때? 자기PR 시대에! 복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복어는  순간을 부푸러 있는  아니지만, 우리가 복어의 이미지를 떠올렸을때 부푼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 마치 한껏 꾸민 연예인처럼. 원래의 복어는 어떤 모습이었더라… 다만 알고선 못하겠다. 뻔뻔하지는 못해서.


-


난 그보단 불나방에 가깝다. 물불 가리지않고 뛰어들면서 스스로 ‘깊이에의 강요’를 요구하는. 그런데 문제는 내 몸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뎀빈다는 것이다. 이제는 덜 다치고 싶기에 좀 설렁하고 싶다만, 몸에 인이 박힌 듯 완벽주의는 나를 지치게 한다. 성에 안 차는 걸 어쩐다.

매거진의 이전글 음악행위자의 관계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