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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를 나는 새 May 20. 2016

지나치게 맛있는 글

어떤 산문집이 미치는 영향

야심한 밤에 이불을 덮고 앉아,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를 읽고 있었다. 어쩜 글을 이렇게 맛있게 끓이셨는지, 읽을수록 입맛 돋고 후루룩 잘 넘어간다.


요즘은 드라마든 뉴스든 쇼든 예능이든, 무엇이든 다 지겹고 사람을 지치게 한다. 가공된 인스턴트 식품 같은 픽션이든, 의미없이 신랄하기만 한 논픽션이든, 티비에 나오는 것들은 다 그냥 그렇고 그렇다. 원래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밖에 위안이 되지 않을 숱한 날들을, 그것과 함께 보내어본 결과 얻은 깨달음이다. 그것들은 자가복제하고, 서로복제하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복제를 강요한다. 그저 서로서로 복제한 후 다같이 똑같아진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참 시시해졌다. 아니, 정말로 완전히 똑같게나 만들어주면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게다 그런 위약을 쳐벅쳐벅 발라놓고는, 혹시나 내 병이 낫지 않을까, 무한정 기다리며 주문 외울 나 자신이 너무 신파스러워서. 지나치게 안쓰러워서. 적어도 당분간은 좀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이었다. 과연 오랜만에 따뜻했고, 잊고 있던 어떤 것들을 마구 떠올리게 했다. 문제는 정말로 배가 고파졌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밥벌이의 괴로움" 을 밥으로 달래고 싶은 부작용이다. 그의 라면 끓이는 비법을 읽다보면 눈앞에서 라면 하나가 끓고 있는 것같다. 라면만 그런게 아니다. 밥 한 숟가락 조차 지나치게 먹음직스럽다.


그러니까 결론은, 밤에 읽을 용도로는 책을 잘못 택했다는 것이다.



"tv광고에서, 라면국물을 쭉 들이켠 연기자가, 아, 하면서 열반에 든 표정을 지을 때도 나는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무더운 여름날, 몸과 마음이 지쳐서 흐느적거릴 때, 밥을 물에 말고 밥숟가락 위에 통통한 새우젓을 한 마리씩 얹어서 점심을 먹으면 뱃속이 편안해지고 질퍽거리던 마음이 보송해진다."


- 김 훈, <라면을 끓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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