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하수를 나는 새 Mar 06. 2016

12시의 자각

부끄러움에 대한 책임

나는 결코 젊다고만은 할 수 없는 여자 사람이다. 그러나 절대 늙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생의 딱 절반 즈음을 가리키고 있을, 나의 시계는 어쩜 그리도 부지런한지. 느려지는 법도 없이 오히려 나날이 더욱 빨라지는 중이다. 이 속도에 못 이겨 급기야 나는 가끔 어제와 그저께의 일을 혼동하거나, 연예인 A 씨와 내가 아는 B 씨의 이름을 혼합하여 제 3의 이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그', '저', '어느' 등 만을 사용해서 말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라며 엄마를 타박하고 싶을 때마다, 너도 그럴 처지가 못된다고 스스로를 타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공포감도 생겨났다. 삶이 요구하는 온갖 숙제들이 주는 피로감에 눌려 꾸벅꾸벅 졸다 문득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시간이 어느덧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는데, 새롭거나 경이롭거나 중요한 어떤 무언가도 만나지도 못했는데, 그렇다고 아주 재미있게 논 것도 아니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깨어보니 시간이 어느덧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으면 어쩌나 



저녁 6시라면 당연히 지금보다는 매우 조심스러울 시간일 것이다. 이제부터 장을 봐서 꽤 맛난 저녁을 만들어 먹을 수는 있겠지만, 아주 바쁘고 인기 많은 지인에게 갑자기 연락하여 집에 초대할 여유는 없는 시간. 또는 다 져 버린 해, 어둑해진 밤하늘을 등 지고서,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산에 가보겠다며 길을 나설 수는 없는 시간. 자러 가기 전까지 남아 있는 시간과 이제는 밤이 되어 버린 환경, 그리고 하루를 버티느라 녹초가 된 몸을 모두 고려하여 앞으로 하고 싶은 단 몇 가지 만을 골라야 하는 그런 시간 말이다.


저녁과 밤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 두렵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딱 그만큼의 시간, 그만큼만 지나면 자정이 되겠지. 이제는 그것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주 아주 먼 훗날이어서 막연한', 그런 시점은 더 이상 아닌 게 되어버렸다. 여태껏 흘러온 시간, 딱 그만큼만 버티어내면 어느 순간 와 있을 그런 시간이 된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내가 해 올 수 있었던 노력의 수준과 경험의 폭을 생각할 때, 정말 똑같은 패턴으로 나머지 반도 흘러간다면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는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 중 많은 것을 이루거나 경험하지 못한 채 그 시간이 되면, 그렇게 된다면, 그때 나는 정말 어찌해야 할까.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은, 지혜로 승화되기 전에 먼저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다.


쳐묵쳐묵 이른 점심을 먹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 50분. 몹시 부끄러워진다. 이 부끄러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12시가 되면 더욱 부끄러울까. 내게 남겨진 10분이 안타깝고, 그 뒤 그 정오의 시간부터 저녁까지 또 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막연해졌다. 게다 여자 사람의 오후는 이것저것 분석의 대상이 되어, 남자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가혹한 평을 받는 법이다. 내가 그러한 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오후 2시 이후는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세상은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날 뱃삯이 없었던 것을 직접 탓하지 않으면서도 나중에 부끄러워진 것은 탓한다는 것이다. 설사 뱃삯이 없어 부끄러워진 것일 때에도 말이다.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한 노력에 모든 것을 바치도록 강요하며 나의 부끄러움을 돌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을 때조차 그러하다. 매우 이상한 노릇이지만, 어쨌든 그 부끄러움이란 것은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날 뱃삯이 없었던 것을 직접 탓하지는 않으면서도
나중에 부끄러워진 것은 탓한다



또한 지금이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은, 시간은 더욱 부족해졌고 뱃삯은 아직도 모자라며, 다만 포기하고 부끄러움을 잊으려 하기에 또한 너무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국을 후루룩 삼키며 모두가 막연하다, 막연하다, 한다. 그리고 막연한 사람들이 모여 막연한 곳을 만드는지, 막연한 곳이 막연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토론을 벌인다. 나는 그 이야기를 가만히 귀로 들으며, 개인적으로는 뱃삯이 없어도 또 열심히 이리저리 하다 보면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나의 오후가 다른 어떤 잘 찍은 점과 연결해서 혹시 부끄럽지 않게 될 수도 있을까도 상상하였다. 그렇지만 어찌해도 이 모든 것에는 뱃삯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돌아오는 나 자신이, 그래서 더 부끄러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긴 하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