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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간은 무심하게 지나가고

겨울학기를 앞둔 지금에서야 쓰는 말

by 썸머

미국에서의 첫 번째 쿼터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매일매일 새로운 모양으로 다가오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꾸준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혼자만 볼 수 있는 글쓰기에 익숙해진 나는 보여지는 글을 쓰는 일을 어색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 달 만에 글 한 개를 겨우 업로드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나 자신이다. 지난 여름까지의 나는 적당히 안정된 직업, 재정, 연애, 취미, 인간관계… 어른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적당한 삶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떠나온 뒤 설렘이 옅어질 때쯤, 이곳의 나는 이제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것만 같다는 생각에 한동안 우울하기도 했다. 그 조급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벗어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가장 조급하게 만든 것은 학업이다. 생각보다 공부를 놓은 6년이란 시간에는 힘이 있었다. 매일의 수업과 과제를 따라가기도 벅찬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준비가 덜 된 탓인지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하는 것도 쉽지 않다.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동기는 휘몰아치는 학기에 지쳐 결국 기말고사를 포기하기도 했으니 꼭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매일 자기 전 잠자리에 누우면 자책과 타협을 진자 운동처럼 번갈아 하곤 했다. 오늘의 이게 내 최선이었어, 나한테는 내일이 있잖아. 근데 사실 내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것 아닐까?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하는 걸까? 긍정적인 마음과 낙천적인 태도가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운 좋게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자책의 순간이 내내 버거웠다. 건강하게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길었던 가을을 지나는 동안 이유 모를 기대도 걱정도 낙담도 체념도 많았지만, 결국 시간은 무심하게 지나가고 흘러갈 것들은 모두 흘러간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우려에 시간을 쓰지 말고, 당장 해야 할 것들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 늘 알고 있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칙이다. 그러나 하염없이 길 것만 같았던 겨울방학도 다음 주면 끝나고, 나는 다음 달리기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 돌이켜보니 1등이 아니면 죽는 줄 아는 철없는 언니에게 ‘언니 내가 살아보니까 1등 안 해도 잘 살아지더라’라던 여동생의 한 마디가 나를 버티게 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세 과목에서 두 개의 A를 받았고, 1등은 아니었지만 아직 잘 살아있는 것을 보니 5살 어린 동생이 오늘은 왠지 언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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