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11월 생일에는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다는 여자친구의 바람으로 9월부터 비행기 티켓과 호텔을 일찌감치 예약해 두었다. 판데믹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여행이 취소되진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실내에서 마스크만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이 다시 이 전 궤도로 돌아온 듯하다.
착륙하는 비행기의 창 밖으로 보이는 스페인의 첫인상은 주황주황이었다. 태양이 광선처럼 내리쬐고 있었고 그 아래로 주홍빛 집들이 옹기종기 산 끝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공항에서 나와 들이쉬는 공기가 무덥진 않았지만 내리쬐는 햇빛은 11월임에도 불구하고 한 여름 같았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지 각색이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사람 옆에 선글라스를 끼고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어떤 날씨인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의 태양은 더블린 보다 더 강렬한 것 같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태양이 내리는데 더블린에서도 그렇고 지금껏 양산을 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양산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다음 한국에 간다면 좋은 양산을 하나 구입해야겠다. 어쨌든 내리쬐는 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더블린의 상쾌한 겨울 공기와 두껍고 봉실봉실한 구름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이번 여행은 여자친구의 생일을 기념해 간 것이라 계획을 세우지 않고 여유롭게 일정을 즐기기로 했다. 나로서도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에 그날그날 마음이 내키는 대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호텔에서 전기스쿠터를 비교적 싼 가격에 대여할 수 있어서 그 점이 무척 편했다. 하루는 일반 자전거를 빌렸는데 익숙하지 않은 안장에 엉덩이가 아프기도 하고 힘에 부쳐서 가기를 포기한 오르막 길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전기스쿠터를 빌려봤는데 일찌감치 전기스쿠터로 대여해서 돌아다닐걸 싶었다. 시내를 마음대로 누빌 수 교통수단만 있다면 다음번 바르셀로나에 방문했을 땐 여행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익히 들었던 것처럼 스페인은 건물들이 참 아름다웠다. 기둥 하나만 보아도 그 작은 공간에 얼마만큼의 고민과 노력이 들어갔는지가 보였다. 돌아다니다 본 어떤 평범한 건물의 커다란 나무 문 하나가 기억이 난다. 그 나무 문은 아주 고급스럽게 조각된 높이가 4–5미터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문이었다. (아쉽게도 사진 찍을 생각을 못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유명한 볼거리라고 소개해도 믿을 것 같은 그런 아름다운 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건물에 그렇게까지 크고 아름다운 문은 없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건축가는 오직 심미적인 목적만으로 설치한 게 아니었을까. 그 문이 생기게 된 역사를 상상을 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스페인의 건물들은 없어도 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치 잘생겼는데 돈까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남을 알고선 점잖게 뽐내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스페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였다. 바다에는 요트가 빼곡하게 정박되어 있었고 그중 몇몇 요트에선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입고 다녔고, 자기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듯 저녁엔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도와 도보 모두 처음부터 잘 설계된 듯 넓고 평탄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버스 전용 차로가 있고, 자전거 전용 도로도 있었으며 동시에 도보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이곳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전동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데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차를 거칠게 몰았다. 횡단보도 초록불에도 멈추지 않고 진입하는 차를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똑같구나 싶긴 했다.
치안에 대한 부분도 걱정을 많이 했으나 더블린과 비교하면 훨씬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위험한 곳은 위험할 것이지만 껄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무리를 지어 시끄럽게 이동하는 10대 무리도 보질 못했고, 노숙자나 구걸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저녁 7–8시만 되어도 술집 말고는 갈 곳이 없는 더블린과 비교해서 저녁시간이 활발했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훨씬 많았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좋은 편이라 여자친구와 나는 마음 놓고 손잡고 다닐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기억나는 건 뮤지엄 앞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우리를 옆 벤치에서 뚫어지게 응시를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아서 몹시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엔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어깨를 두르고 그 할아버지 앞을 지나쳐 갔다. 이것만 제외한다면 불쾌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스페인이 아름다운 도시이고 발달한 관광도시라는 것은 더블린에 돌아왔을 때 실감이 났다. 스페인이 주황색이었다면 더블린은 회색이라고나 할까. 이 전에는 볼 수 없던 더블린의 추레함이 보이는 것 같았다. 며칠 안 되는 그 사이에 스페인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눈이 길들여졌는지 이 전에는 아기자기하다고 생각하던 더블린의 오래된 집들이 후줄근해 보였다.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라스마인으로 들어오는데도 방금 전까지 보던 스페인과 비교가 되니 시시했다. 알던 사람이 아일랜드를 떠나면서 더블린은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하면 시골느낌이 난다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이제는 나도 그 분과 같은 시야가 생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의 집에 돌아오니 무척 좋다. 겨울답게 차가운 공기와 하늘에 두껍게 쌓인 구름, 바람에 슬리는 풍경을 보니 마음이 평화롭다. 무엇보다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고 와서 참 다행이다. 처음으로 해 본 여행에 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다음 행기 티켓은 어디로 예약해 볼까 벌써부터 설렌다.
(작성일: 202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