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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hdainy Feb 01. 2024

제주 한 달 살기, 이제 2주 살았습니다.

출발에서 2주차인 오늘까지의 나날들 정리

7-8년 전인가? 한참 제주 한 달 살기가 유행이었던 것 같다. 시기적으로 언제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요즘 '제주 한 달 살기' 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뭔가 이미 유행은 지났다는 느낌이 들기에 대충 그렇다고 하자. 사실은 이제 유행을 떠나서 나처럼 퇴사 후 시간을 보내거나, 여행을 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가 잡긴 했지만 말이다.


굳이 한 달 살기, 그것도 제주도를 선택한 것은 딱히 대단히 의도가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남편이 서울 출퇴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고양이를 동반 해야 했기 때문에 무조건 국내여야 했고, 여행에서 숙소와 숙소 1km 근방의 로컬 환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 취향을 반영하면 제주도 밖에 남는 선택지가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강원도 고성이나, 경상도 안동 등에서도 한 달 살기 숙소도 많이 생기고 있어서 올해가 지나고 1-2년 뒤가 되면 제주도 말고도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길 것 같다.


2주간 살아본 지금까지의 소감을 짧게 말하자면 '아, 한 달이 너무 짧다. 정말 눈물나게 짧다.' 이다. 이렇게 좋을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나의 지난 커리어와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겠다고 주변인들에게 말을 해두긴 했지만, 그 말도 일정 부분 스스로를 속이는 광고 문구 같은 거라고 여겼던 나다. 그 광고 문구에서 홍보했던 커리어 회고나 향후 방향성에 대한 생각 정리는 아예 하지도 않은 축에 가까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즐겁다.







2024/1/14 일요일, 1일차 

이번 한 달 살기에서 가장 걱정 되었던 것은 역시 심바를 비행기에 태우고 이동하는 거였다. 워낙 겁이 많은데다가 올해 9살이 된 고양이로서 적은 나이가 아니므로, 혹시나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출발하기 한참 전부터 걱정했다. 제주도로 떠나는 날이 다가오면 올 수록 심바가 잘못 되는 꿈을 꾸는 날도 있었고, 이미 출발 이전 2주 연속으로 심바 포획 및 건강 검진에 실패한 상황이라 일종의 스트레스까지 쌓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심바는 이동장에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쉬야와 응가를 실수하고 내 손가락을 끊어낼 만큼 세게 물어서 피를 철철나게 만들긴 했지만 무사히 이동장 입장, 기내 동승 무게 통과, 제주도 도착까지 별 탈 없이 도착했다.




2024/1/15 월요일, 2일차

첫날, 둘째날에 빠르게 생필품을 정리하고 제법 집 같은 구색을 갖췄다. 나름대로의 이사날을 기념하면서 모슬포항의 중국집에서 엄청난 해물 짬뽕을 먹기도 했다. 남편은 매주 초에는 서울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월요일 저녁에 서울로 올라갔다. 저녁에 나와 심바 둘이서 2층의 미니 영화관에서 같이 넷플릭스를 보는게 이 때부터 일요일 저녁 루틴이 되었다.



남편의 재택근무 업무방, 손님 맞이를 위한 게스트룸+욕실, 세탁기+건조기 세트, 바다 뷰 등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통과한  숙소!




2024/1/16 화요일, 3일차

한 달 살기의 반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이 날만큼 날씨가 좋았던 날이 없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텐데 아쉽다. 최근 퇴사한 회사에서 나랑 같은 날에 퇴사하게 된 전 동료가 제주도에 방문했다. 사실 일요일에 공항에서 마주쳐서 너무 신기했는데, 이렇게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니 기분 좋은 생경함이 더해졌다. 그녀와 2박 3일 동안 같이 지냈는데, 지내는 내내 내가 인생사진을 많이 찍어줘서 뿌듯했다. 날씨가 다 했다.


오후에는 마찬가지로 전 직장 동료분과 동료분의 여자친구분이 오셔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금오름에 가서 노을을 보았고 (금오름 10분 만에 완등이라는 믿기지 않는 속도) 저녁에는 모슬포항 미영이네에서 고등어회를 포장해서 먹었다.



2024/1/17 수요일, 4일차

아침에 산책을 나섰다. 신도항 방면으로 걸어가서 어촌계식당에서 정식을 점심으로 먹는 코스였는데,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골든 리트리버가 해안가에서 신나게 뛰어 노는 모습을 보는 것에 넋을 놓게 되었다. 관심에 목마른 귀여운 강아지였는데 이 날 이후로는 같은 루트로 산책을 해도 만날 수 없어서 아쉽다.


식사를 하고 집에서 잠시 쉬고 난 후 집 근처에 도보로 갈 수 있는 미쁜제과에 갔다. 날씨가 좋아서 정원에서 주문한 음료를 마시는데, 저 멀리 보이는 아주 특이한 동그란 지붕을 가진 건물. 검색해보니 기후전망대이고 수월봉이라고 하는 제주도 최서단 오름이라고? 우리 한번 가볼까요? 하고 걷기 좋아하는 퇴사자 두 명은 그렇게 한 시간을 양배추 밭을 따라 걸으며 수월봉에 올랐다. 나만큼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여행 스타일이 잘 맞아서 2박 3일간 행복하게 지냈다. 그나저나 양배추 밭을 처음 봤는데 꽤 충격 받았다. 세상에나, 저렇게 크게 자라는 채소가 있다니. 이 날은 걸어가면서 무 수확하는 것도 보고, 여러 작물들을 만나서 서리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다가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마음을 접었다.




2024/1/18 목요일, 5일차

아침 산책을 하면서 돌고래를 만났다. 숙소가 있는 곳이 돌고래 스팟으로 유명한데 생각보다 빨리 만났다. 그리고 이 날 이후로는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2박 3일간 우리 집에서 머물던 퇴사자 동지가 이 아침 산책을 끝으로 점심 쯤에 떠났고 오후에 남편이 서울에서 복귀하기로 되어 있어서, 집 청소를 하고 책도 읽으며 심바와 시간을 보냈다.




2024/1/19 금요일, 6일차

제주도에 온 지 거의 1주일만에 제대로 제주도 데이트를 즐긴 날이었다. 이 날은 우리가 연인이 된지 4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고, 월~목요일 동안 회사 업무로 떨어져 있었던 남편의 속죄(?)가 있던 날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일본 음식점에서 거의 근 몇 년간 먹은 덮밥 중 가장 맛있었던 덮밥을 먹고, 저녁에는 한림 근처 이탈리안에서 아껴온 와인을 오픈하기도 했다.

낮에는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곶자왈에 갔고, 저녁에는 심바와 시간을 보냈다. 곶자왈이 있는 동네는 제주도 국제학교들이 모여 있는 에듀타운인데 추후 아이를 낳으면 제주도 국제학교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부동산 가격도 찾아보고 동네 아파트 단지들을 돌아보다가 뜬금없이 와인샵에서 와인도 사왔다.



2024/1/20 토요일, 7일차

이 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립이라는 카페에 갔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서 아기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는데, 세상에나, 이렇게 작고 소중할 수가. 180g 의 심바를 육묘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아기 고양이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흥분된다. 공간도 좋았고 날씨와 잘 어울렸다. 저녁에는 전 직장 동료와 남자친구분이 함께 방문해서 저녁을 먹었다. 이 날은 부두식당에서 방어회를 픽업해서 먹었다.





2024/1/21 일요일, 8일차

아침에 손님 커플과 근처 카페 핀스에 갔다가 귀여운 진돗개를 만났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좋았던 건 나갈 때마다 귀여운 동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도시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중대형견들이 많아서 행복하다. 고산에 손님을 내려주고 근처 막국수 집에 들어 갔는데, 빠르게 끼니를 해결하려고 들어온 손님 커플과 또 만났다. 조금 멋쩍지만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막국수를 먹은 후 근처에 데스틸이라는 카페에 갔는데 이 날의 기억이 좋아서 그 후로도 한번 더 갔다. 저녁에는 처음으로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자이글을 이용해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한라산 소주를 한 잔씩 기울이며, 진지하게 경기도 광주의 타운하우스로 이사 가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4/1/22 월요일, 9일차

엄마가 왔다. 요리 못하는 딸과 사위가 굶어 죽을까봐 반찬을 바리바리 싸왔다. 엄마가 가져다 준 반찬 덕분에 지금까지 굶지 않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너무 아쉽게도 엄마가 온 기간동안 날씨가 가장 험했다. 제주도에서 출발하고, 들어오는 비행기가 한 때 모두 취소 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엄마가 온 첫 날은 눈이 오는데도 큰 맘을 먹고 본태박물관에 갔는데,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눈이 미친듯이 내려서 박물관에 들어가지도 않고 바로 집으로 복귀했다. 오는 길에 모슬포항에서 파스타를 한 그릇 해치우고 집에 돌아와서 심바와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오니까 귀신 같이 알아보고 편안해하는 심바가 신기했다.




2024/1/23-24 화,수요일, 10~11일차

 

미친듯이 바람이 불고 눈이 왔다가 우박이 내렸다가 해가 비추었다. 이 정도로 미쳐 날뛰는 날씨는 처음이었다. 엄마와는 하루종일 집에 머물면서 식사를 하고 낮잠을 자다가 오후에는 미쁜제과에 갔다. 가는 동안 문자 그대로 바다로 날아가는 줄 알았다. 엄마 왔을 때 하필 이런 날씨가 속이 상했다. 엄마는 나와 한라산 등반을 하겠다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왔는데.


식사 후 잠시 들렀던 블루웨일 카페

수요일에는 오빠가 제주로 복귀해서 셋이 갈치조림을 먹으러 갔다. 엄마가 궂은 날씨에 숙소에서만 지내고 가서 아쉬운 2박 3일이었다.





2024/1/25 목요일, 12일차

드디어,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했다. 부끄럽지만 난 지금까지 운전면허가 없었다. 서울에서도 중심부에만 20년간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운전 면허가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민망한 사실인 건 변함이 없다. 마침 전국에서 가장 시험이 쉽고 빠르게 면허를 딸 수 있다는 학원이 제주도에 있었고 집에서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찾아가서 등록을 했다.


점심에는 전부터 가려고 했던 무릉리에 있는 나무식탁에서 소바를 먹었다. 운전면허학원 등록을 한 후에는 근처 대형 카페에서 한참 일을 했는데, 그 규모와 손님없음(?) 을 비추어 볼 때 부자 사장님이 분명 자아실현이나 취미 생활로 하고 있는 곳이 분명했다.


저녁에는 축구 경기를 보면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이제 심바도 완전히 적응해서 1층에서 우리가 고기를 구울 동안에 배를 보여주면서 바닥에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2024/1/26 금요일, 13일차

간만에 맑은 날씨였다. 아침에 남편과 집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귀여운 강아지는 유기견이었는데, 카페 사장님이 주인을 찾았고 오후에 데리러 오기로 한 상태였다. 꼬질한 귀여움이 있다) 혼자 2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집 근처를 산책했다. 한참동안 바다를 보면서 뚝방에 앉아 있기도 하며 제대로 비타민 D 충전을 했다.

집 근처에 고양이 가족이 살아서 언젠가 밥을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성공한 날이었다.


저녁에는 남편의 지인분이 오셔서 저녁을 함께 했다. 이 날도 역시 손님용 대접 음식인 미영이네 고등어회를 포장해서 먹었다. 남편이 최근 들어서 가장 친해진 분 중의 하나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제주도에서 처음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4/1/27 토요일, 14일차

아침에 셋이서 잠깐 미쁜제과에 갔다가 이전에 한번 방문했던 데스틸로 갔다. 남편과 지인분은 함께 있는 내내 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나는 다음 주에 있을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준비하려고 문제집을 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잠이 쏟아져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집에 잠시 들른 후에는 남편과 둘이서만 잠시 노을을 보러 군산오름에 올랐다.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 노을은 보지 못했지만 간만에 높은 곳에 함께 올라가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저녁에는 전 직장 동료 커플이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남편의 지인분과 전 직장 동료가 원래 아는 사이라니, 역시 테크 스타트업 판은 좁고도 좁다.





2024/1/28 일요일, 15일차

남편 지인분과 금자매식당에서 점심을 마지막으로 작별을 하고 오후에는 남편과 둘이 시간을 보냈다. 이 날은 남편에게 코스를 짜보라고 했는데 그가 영 소질이 없는 영역이라 내가 심통이 났다. 남편이 겨우 검색해서 알아낸 카페 3인칭관찰자시점, 분위기도 뷰도 좋았지만 토라진 채로 갔다보니 온전히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 근처에 독립서점인 책은선물 이라는 곳에 가서 책도 하나 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2층 테라스에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놓고 맥주를 먹어 보려고 했으나 바람이 너무 심해서 실패하고 소파에 누워서 2시간 넘게 낮잠을 잤다. 낮잠 자는 동안 심바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귀엽다고 찍어줬다.





2024/1/29 월요일, 16일차

대망의 운전면허 시작의 날! 아침에 집 앞까지 온 셔틀버스를 타고 학원에 갔다. 3시간동안 안전교육을 받고 필기시험을 쳤다. 결과는 합격! 뭔가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


학원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뚜벅이 모험을 떠나보기로 했다. 유명한 버거가게인 슈퍼마켓화이트버거스탠드에서 혼자 버거를 먹었다. 먹자마자 너무 맛있어서 내일 또 와야하나? 할 정도였다. 지금 사진 보면서도 입에 침이 고인다. 역시 나는 파이브가이즈 같은 스타일보다는 이런 간단한 버거 타입이 입맛에 맞는다. 근처에 유명한 푸딩가게인 Umu가 있어서 당근 푸딩, 말차 푸딩, 커스타드 푸딩도 샀다.

집에 와서는 드디어, 벼르고 벼렀던 2층 테라스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광합성을 하면서 맥주 한 잔을 하니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주도에서 이런 날을 즐길 수 있는 날씨가 얼마 없다는 것을 이제 점점 알아가고 있어서 그 생각은 다시 접어두었다.


뒷마당에 꿩이 산다


저녁에는 서울에서 남편이 복귀해서 간단하게 야식거리를 만들어주고 함께 잠들었다.





2024/1/30 화요일, 17일차

남편 회사 팀원분들이 제주도로 워크샵을 왔다. 숙소는 우리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잡았다. 남편과 둘이서 우동 밀키트로 점심을 해먹고, 잠시 팀원분들과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근처 핀스에서 노트북 작업을 한 뒤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사실은 동생이 없어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친동생 같은 동생이 남편 팀원으로 일하고 있는 재밌는 상황에서, 현채는 제주도에 와서도 어김없이 또 요리를 해줬다. 최근 먹은 파스타 중에 제일 맛있었다.


너무 하찮은 고양이



2024/1/31 수요일, 18일차

대망의 기능수업, 시험 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학원에서 알려준대로 택시를 잡고 학원에 도착해서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난생 처음으로 운전석에 앉아서 조작을 하니 설렜다. 그리고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 않았다! 심바마냥 나도 워낙 겁이 많아서 평생 운전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까지 할 정도였는데 막상 해보니까 너무 재밌어서 4시간 수업 시간에 1시간 마다 10분씩 쉬는 시간에 얼른 다시 운전대를 잡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바로 시험을 봤다.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통과했다. 다음 주에 도로주행 일정을 잡고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뚜벅이 여행을 떠났다.


버스로 뚜벅이 여행을 하면서 이제 제주 서쪽은 구석구석 다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직접 걸어보고 버스를 타고 돌아 다녀봐야 각 지역에 대한 진한 기억과 동시에 애정도 생기는 것 같다.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려서 이전에 갔던 나무식탁의 소바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사진을 나열하면서 보니까 나는 정말 면식 괴물수준으로 면을 좋아한다.)




제주에서의 2주동안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사실 삶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 장난같지만 여의도에서 대한민국 최남단인 제주도까지, 이러나 저러나 섬사람 신분은 못 벗어났지만 그 삶의 모습은 크게 다르다.


집 앞 1분 거리에 나라에서 가장 크고 붐비는 쇼핑 센터가 있으며, 24시간 운영하는 술집이 즐비한 곳, 여의도는 그렇다. 지금 머물고 있는 제주도 서쪽, 그 중에서도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상업 시설이 드문 대정읍 신도리에서는 5시만 되면 집에 들어오게 된다. 6시가 되기 전에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심바의 식사를 챙겨주고, 점심 식사 준비를 하면 벌써 반 나절은 다 지나간다. 오후에 산책을 하거나, 근처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면 또 저녁 식사 시간. 장 봐온 음식들로 뚝딱거리지만 무언가를 만들고 나면 곧 잘 시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급하지 않다. 이대로 정말 인간답게 충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아야 했던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금처럼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삶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는 없겠지만, 태초에 인간은 원래 이렇게 식사를 준비하고, 햇빛을 쬐고, 낮잠을 자고, 청소를 하고 잠에 드는 존재였던 것이다!


원래는 제주에 와서 하려고 계획해둔 것이 많았다. 특정 음식을 마스터한다던가, 우쿨렐레 3곡을 마스터 하겠다던가 하는 백수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목표들은 잊은 채 하루하루 간단한 루틴을 반복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원래의 나라면 아직 체크 되지 않은 to do list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게 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빡빡하게 살던 내가 제주에서의 한 달로 인해서 완전히 치유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래도 괜찮구나.' 라고 하는 경험을 짧게나마 해본 것은, 앞으로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내리는 선택들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제 2주가 채 남지 않았다.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남은 기간동안에 날씨가 맑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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