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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hdainy May 01. 2024

2024년 1분기 회고 (1)

자유 시간이 생긴 백수는 위시리스트를 해결하지

1분기 회고를 해보려고 한다.

그 중 초반 1달은 제주에서 지냈고 이미 매일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기록했기 때문에,

이왕 회고가 늦어진 겸 4월까지 포함해서 내가 지난 몇 달간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도록 하겠다.



퇴사 후 문화생활 벼락치기


2023년 12월 31일자로 퇴사를 한 후, 2024년의 첫 4개월 동안 백수로 지낸 기간은 정확히 2달 반이다.

3월 18일부터 첫 출근을 했으니 정확히는 10주 쉬었다.

적어도 3개월은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냉정하게 날짜로 따져보니 얼마 놀지도 않았다.


쉬는 기간에 그동안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어서 위시리스트에만 남겨두고 가지 못했던 곳들을 많이 갔다.

대부분 미술관이었고, 토크콘서트, 연극 공연, 영화, 야구 경기도 보러 갔다.


대학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많이 느꼈다. 그 땐 시간과 돈만 있으면 마음 가는대로 꼭 무언가 보러 가거나 체험하러 다녔다. 당장 제출 해야하는 전공 에세이는 뒤로 한 채로, 프랑소아 오종의 신작을 보러 조조로 영화관에 뛰어 가고, 기타노 다케시 특별전을 찾아가거나, 하루종일 영풍문고 (난 언제나 교보문고보다는 한산한 영풍문고를 좋아했다) 한 자리에 틀어 앉아 책을 보고, 어떤 날은 날이 좋다는 이유로 학교에 갔다가도 자체 휴강을 선언하고 신촌에서 집까지 2시간을 그저 걸으면서 음악을 듣기도 했다. 대학생이란게 사실 백수나 다름이 없지만, 유독 그들에게 너그러운 사회적 제도로 인하여 '대학생' 이라는 별도의 신분을 부여 받고 자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1분기의 2달 반은, 나에게 좋았던 그 시간으로 잠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2024년 1월 5일,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올해 갔던 국내 전시 중에는 제일 좋았다. 하반기에는 더 좋은 전시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지만, 전시 구성을 떠나서 장욱진의 그림들과 그의 철학이 가지는 힘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과연 가능할까 싶긴하다.


2024년 1월 9일, 이태원 만화서점 '그래픽'

그래픽은 처음 오픈할 때부터 너무 가고 싶어서 '언젠가는 꼭 가고 말리라!' 생각만 하고 있다가, 백수가 되고 나서야 갈 수 있었다. 함박눈이 온 다음날이어서 가뜩이나 경사가 많은 이태원 특성상 가기가 쉽진 않았는데 하이볼 한 잔 주문해놓고 가져온 책을 읽으며 (막상 그래픽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은 안 읽었다) 시간을 보냈던 기분이 지금도 잔잔하게 남아 있다.


2024년 1월 10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 씨네큐브

류이치 사카모토를 좋아하긴 했지만, 헤비한 팬은 아니었는데 지혜님의 제안으로 보러갔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연주로만 채워지는 영화라니. 지난 12월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담긴 영화 <괴물> 을 보고 난 뒤라 그런지 영화를 보는내내 그가 음악을 맡았던 다른 영화들이 함께 겹쳐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2024년 2월 1일,  <앙리 마티스와 라울 뒤피:색체의 여행자들> @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도 1달 살기 글에서도 쓴 적 있었던 전시.



2024년 2월 15일,  <만년사물> @ 서울공예박물관
2024년 2월 15일, <올해의 작가상: 2023>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 날은 하루종일 엄마랑 데이트를 했던 날이다. 전시 보는 걸 좋아하는 엄마 취향에 맞춰서 공예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까지 두 곳에서 전시를 보고 점심엔 한식 오마카세, 저녁에는 인왕산이 한 눈에 보이는 카페에서 말차를 마신, 왠지 모르게 서울 한복판에서 교토스러운 하루를 보낸 날이라고 해야하나.


2024년 2월 17일, <회사 만들기> @ 피크닉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이 보면 흥미로워 할 것 같은 전시라서 다녀왔다. 사실 내 개인적인 취향에는 그렇게 재밌는 전시는 아니었는데, 순수예술을 어려워 하는 그와 함께 '무언가 감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취향을 양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던 전시.



2024년 2월 22일, <Miro Picasso> @ Joan Miró Foundation � Barcelona, Spain

뜬금없이 가게된 짧은 유럽 여행에서 정말 미술관을 많이 갔다. 그 첫 미술관은 호안 미로 미술관. 호안 미로의 친구이자 초현실주의 선배격인 피카소의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2024년 2월 23일, @ Museu Nacional d'Art de Catalunya � Barcelona, Spain

혼자서 4시간 넘게 시간을 보냈던 카탈루냐 미술관. 유럽 여행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사실 유명한 미술관은 웬만하면 다 가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좋았던 곳이다. 연도별로 작품이 아주 많은데, 대부분 카탈루냐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연도별 전시를 하는 대도시 대표 미술관들에 가면 항상 고딕관이 제일 재밌기 마련이다. 카탈루냐 미술관 고딕관에서도 정말 '또라이' 같다, 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예수상과 컬트적인 신체 비율, 미묘한 표정들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막상 위에 올린 그림들은 고딕 시대 그림들은 아니긴 하다.



2024년 2월 24일, @ Casa Milà by Antoni Gaudí � Barcelona, Spain

9년 전에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까사 밀라와 까사 바트요를 제외한 모든 가우디 건물은 가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가우디를 접했을 때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한 건물에 들어가보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번이 두번째 유럽 방문이었던 남편에게 소위 말하는 '관광지 스팟' 을 경험 시켜주는 것도 큰 목적이기도 했다.


2024년 2월 24일, 플라멩고 공연  � Barcelona, Spain

9년 전에 스페인 여행을 왔을 때에는 1달을 머물면서 스페인 전국을 돌았다. 플라멩고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세비야에서 엄청난 양질의 공연을 보았던 경험 때문인지, 바르셀로나 관광지 한가운데 자리한 공연장에서 본 이 공연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2024년 2월 25일, La Sagrada Familia by Antoni Gaudí � Barcelona, Spain

9년 전에 왔을 때랑 비교해보니 뭔가 많이 올라간 것 같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다시 봐도 절경이었다. 내년이면 완공이라던데, 과연 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2024년 2월 25일, @ Picasso Museum � Barcelona, Spain

사실 피카소 작품은 워낙 많기도 하지만, 실제로 전시도 무척 많이 갔다. 내가 어릴 때부터 다른 건 몰라도 전시, 공연을 보러 다니는 것에 열정적이었던 엄마를 따라서 유명 작가 전시가 열리면 1등으로 가서 보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대인기인 피카소의 그림은 볼 기회가 아주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막상 피카소 박물관에 가서는 많은 인파에 휩쓸려 유명 작품들만 뷔페식으로 보고 얼른 나와버렸다. 피카소 작품들이 딱히 취향이 아닌 것도 있고.


2024년 2월 27일, @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이번 유럽 여행은 이 곳을 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실 누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반 고흐의 작품들만 볼 수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드디어 가게 된 것이다. 그동안 네덜란드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이번에 짧게 이틀 간 머무르면서 숙소도 반 고흐 미술관 바로 앞에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틀 내내 갈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미 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모국에 와서 실물 작품들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그동안 많은 전시를 보았지만 전시장을 빠져 나오면서 눈물이 났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흐의 고통, 사랑, 연민, 광기, 그 모든 것들이 작품에서 느껴졌고 이미 100년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친구가 처음으로 나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 심리적 가까움도 느껴졌다. 내 인생 최고의 전시 경험이었다.


2024년 2월 27일, @ Rijksmuseum�Amsterdam, Netherlands

반 고흐 미술관 바로 옆에 있는 국립미술관에도 갔다. 오전에 관람한 반 고흐 작품들의 여운이 너무 길어서인지, 당장 저녁에 한국으로 돌아가야하는 스케줄 때문인지 작품들에 크게 집중하진 못했다. 램브란트의 유명한 몇몇 작품이 있어서 관람했다.


2024년 3월 1일, <유피디 모놀로그 by XSFM> @ 흰물결아트센터 화이트홀

고등학생 시절엔 래퍼로, 20살 넘어서는 팟캐스트 진행자로 10년 넘게 꾸준히 팔로우하며 좋아하고 있는 XSFM의 사장님이자 프로듀서인 유승균 피디의 공개방송에 다녀왔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동안 청취해온 내 인생이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경험도 하고, 원래는 사인을 받지 않는데도 창피함을 무릅쓰고 사인을 받고 준비한 스몰톡도 하며 함께 사진도 찍었다. 성덕이 된 이 날 이후로, 1주일 내내 기분이 좋았던 기억.


2024년 3월 6일, 조향 클래스 @ 비푸머스 (홍대)


평소에 향에 관심이 많다. 취향을 담는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용돈을 받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이런저런 향수를 사서 모으는게 취미였다. 학창 시절에 조향사라는 직업을 알게 된 후 진로로 꿈꾸었던 적도 있지만, 주로 이과생만 갈 수 있는 화학과에 진학해서 석사 과정도 필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재빨리 포기했다.


몇 년전부터 조향 클래스가 많이 생겼고 항상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갖고 갈 기회가 없다가, 집에서 가까운 홍대에 위치한 ‘비푸머스’ 에 급예약을 하고 지혜님과 함께 다녀왔다. 향 노트들도 배우고, 여러 향료를 시향했지만 소나무 취향에 걸맞게 죄다 woody 노트를 골랐지만, 처음에 계획한대로 ‘우디하고 달콤하지만 무겁거나 느끼하지 않고 봄여름에 어울리는 가볍고 서늘한 향’ 을 제조할 수 있었다.


향수 이름은 고흐 미술관에서 실물로 본 Almond Blossom에서 따왔다.



2024년 3월 9일, <파묘> by 장재현 @ 여의도 CGV

근 1-2년 사이에 스스로 알게 된 취향 중의 하나가 오컬트다. 몰랐는데 나 오컬트 좋아했더라. 장재현 감독 작품은 <검은사제들> 을 정말 재밌게 봤고, <사바하> 는 그에 비하면 범작이라고 생각했다. 파묘는 하나의 작품 안에 워낙 극명하게 갈리는 2가지의 스토리라인이 있어서 호불호가 꽤 갈리긴 했는데, 사실 이게 '조선 오컬트' 오락 영화라고 본다면 별 거 아닌 장애물이긴 하다. 2시간 내내 아주 신명나고 재밌게 봤다. 파묘 뒤로 나온 SNL 이수지의 김고은 모사 덕분에 그 즐거움이 오랜 시간 이어졌던 작품.



2024년 3월 11일, <Dune: Part Two> by Denis Villeneuve @ 영등포 CGV 아이맥스

듄 2. 이건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100년대가 끝나가는 시점에는 Dune 시리즈가 인류 세기의 유산으로 등록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 아트웍, 음악, 촬영 등 그간 인류가 쌓아온 모든 것의 최정점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2024년 3월 13일, <Poor Things> by Yorgos Lanthimos @ 신촌 CGV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대표작들을 챙겨봤었다. <Lobster> 는 수년 전에 보았지만 지금도 멍하니 있다가 가끔씩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기괴하고 재밌는 영화였고, 제주도에서 본 <The Favorite>,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도 취향이 맞아서 마침 개봉한 그의 신작을 관람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봐도 '어라, 지금 내가 뭐 본건지?' 싶은 영화이지만, 시각적인 면에서 극도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지능을 제거 당함으로써 되려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아이러니를 잘 포착했다고 본다. (그 반대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는 잘 만든 영화다)


2024년 3월 17일, LA Dodgers vs. 키움 히어로즈 @ 고척 스카이돔

세상에, 오타니가 한국에 오다니. 가희님 생일 선물을 겸해서 함께 오타니가 출전하는 서울시리즈를 보러 갔다. MLB의 팬층이 고령화 되면서 아무래도 미국 시장 외의 소비자들을 찾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서울 시리즈. 오타니가 이 날 못하기도 했고, 아파서 두 타석만 치고 들어가서 아쉬웠지만 MLB 선수들을 서울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 때 LA 다저스 선수들이 집 바로 앞에 있는 페어몬트 호텔에 묵었기 때문에 잘만 기다리면 오타니를 가까이서 볼 수 도 있었지만 이미 호텔 앞에 줄서고 있는 헤비팬들이 많아서 시도해보진 않았다.


2024년 4월 1일, <일생의례> @ 모리함

지인분이 운영하시는 사업장이자, 전시 공간인 모리함. 지인분 아버지의 고희연을 멋진 전시로 풀어냈다. 아버지의 인생의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의미가 담긴 여러 물건들을 모아서 전시를 했는데, 그 전체 플로우를 따라가면서 나도 이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24년 4월 21일, <NTOK Live+ : Fleabag> @ 국립극장

내가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인 플리백은 프로듀서이자 주연인 피비 월러 브리지가 올린 연극이 원작이다. 시즌1은 사실상 연극을 드라마화 해둔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연극 실황을 녹화한 영상을 국립극장에서 상영하여 다녀왔다. 알고보니 해외에서 진행하는 좋은 연극 작품들의 녹화본을 국립극장에서 'NTOK Live+' 라는 시리즈로 진행하고 있었다. 플리백을 너무나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보석같은 기회였는데, 플리백이 어떤 작품인지 모르고 온 것 같은 기존 엔톡 라이브 팬들이 많이 보여서 괜시리 그들 걱정을 하면서 작품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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