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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25. 2024

(팀)장미와 시월에서 소주를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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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미와 오랜만에 만나 시월에서 소주를 마셨다. (팀)장미는 프로젝트 그룹으로 대중음악계 기획자와 작곡가 겸 교수와 미디어아티스트 겸 포토그래퍼와 작가 겸 잡무를 맡고 있는 나까지 네 명이 모여 있다. 일찍 핀 꽃이 오래 기다릴까 저어 되어 오랜 시간 봉오리가 펼쳐지기를 기다리며 이런 꿍꿍이, 저런 꿍꿍이를 모의하고 있는 (팀)장미. 쓰고 보니 한량 모임 같지만 각자 본업으로 너무나 바빠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일정 한 번 잡기가 어려워 두어 달에 한 번 만나기 일쑤다. 이 날은 우리가 석 달 만엔가, 넉 달 만엔가 만나 반가움이 그득그득한 팀원들과 함께 시월에 갔다. 이름부터가 한량인 듯 한량 아닌 우리들과 찰떡이었달까.


그림으로 보아 분명 '선비'일텐데 욕으로 읽은 나를 반성(?)하며 남긴 시월 가는 길에 있던 어느 가게와 마음에 쏙 들었던 시월.


그렇게 오랜만에 모두 모인 4인조는 아낌없이 먹고, 마셔 재꼈다.



안부를 묻고, 근황을 확인하고,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미디어 아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맏형의 이야기를 듣다가 둘째 형의 이야기에 젖어들다가 셋째 형을 위로하다가 막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여기 한 병 더 주세요"라고 외치는 동안 소주병은 줄을 선다. 소주병이 줄 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주를 더 시켜야 하나 술을 더 시켜야 하나 가늠해야 한다. 발동이 걸리면 처음부터 두 병씩 시켜 테이블 양 끝에 두고 마시기도 했는데 형들도 나도 나이 먹으면서 한 병씩 시켜 버릇하게 되었다. 고작 다섯 병 마시고 무슨 허세를 부리나 싶겠지만, 걱정 마시라. 이 날따라 꺾지도 않고 원샷을 이어갔고, 오랜만에 막내 귀여워해주는 형들 만나 응석 부리다 신이 나서 여섯 번째 병 시킨 뒤로 기억이 없다. 요즘 젊은이들 이야기를 하다가 인생네컷에 가서 사진을 찍고 간식을 겸해서 뭔가를 먹었던 것도 같은데... 2차로 해산물 주점을 가서 아마도 셋째 형이 좋아하는 문어숙회를 먹었을 것이다. 아마도 각자 1병 조금 넘게 마셨을 테고, 맏형이 버스 타는 것을 배웅하고 셋째 형이 대리와 접선하러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둘째 형이 신나 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 택시를 태운 뒤 마지막으로 귀가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편의점에서 빵을 두어 개쯤 사가지고 돌아와 청소하고 씻고 빵을 먹었을 것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책장을 뒤집어엎고 있었다.



지난 세밑에 가구 위치를 싹 바꾸면서 책장 속 사람들도 두서없이 흩어졌는데, 그래서 사람들 보금자리를 재정비해야 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이 하필 이날 터진 것이다. 책장에는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라 각종 잡동사니도 군데군데 끼어 있었는데, 한 번에 다 털어내어 다시 자리를 잡으려니 금방 끝낼 거라 생각했던 정리는 새벽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헤아려보니 450여 권 정도 되는 책과 기타 등등을 삼삼 오오 짝을 지어 정리하려니 이 집은 비는데 저 집은 넘치고, 이 사람을 뉘었다 일으켜 세웠다 하느라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상태로 두고 잠들 수밖에... 아니,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같이'라기에는 해가 중천이었지만- 정리를 마치고 나니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집을 못 찾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붙들고 앉아 이야기를 나눠봐도 더 이상 떠나보낼 사람이 없었다. 하필 남은 사람들은 오래 만나 숱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방 한 칸 더 마련해 보겠다 어르고 달래 임시방편으로 사람들을 상자 속으로 임시 입주 시킨 뒤에야 책장 정리는 끝이 났다. 호기심에 분해했다 다시 조립했는데 두어 개의 볼트와 하나의 너트가 미처 제 자릴 찾지 못했는데도 멀쩡히 작동되는 라디오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팀)장미 같았다. 조립을 마쳤고, 작동도 잘 되는데 미처 제 자릴 찾지 못한 볼트와 너트 몇 개 때문에 판매할 수 없는 라디오 같았다. 그렇다고 분해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탓할 수는 없다. 그 무수한 호기심이 네 형제(?)를 고운 정 씨실 삼고 미운 정 날실 삼아 엮었으니까. 내 등허리에 자리 잡은 춘분과 매화, 그리고 "일찍 핀 꽃이 오래 기다린다"는 말. (팀)장미는 일찍 피어 오래 기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좀 늦게 피어도 괜찮다. 차근차근 꼼지락꼼지락 우리는 만나고 음악과 영상과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될지 모를 꿍꿍이짓을 궁리하고 있으니까. 일단 봉오리를 틔우면 (팀)장미는 아찔한 향기로 유혹하고 날 선 가시로 베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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