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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l 18. 2024

수제 꼬치와 소주를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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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좀 멜랑꼴리 한 며칠이었다. 단편영화 하나 만들고, 동료들과 상영회를 두 번이나 했고, 동료들은 아플 수밖에 없는 말과 희망의 조각을 보게 만드는 말들을 정성스레 해주었다. 그래서 무슨 고생을 얼마나 했든 겸허히 결과를, 결과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가 닿았고 그것은 꽤나 멜랑꼴리 한 것이어서 꽤나 오랜만에 내 마음은 슈크림 상태가 되었고, 술을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공방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첫 번째 단골집은 툭하면 사장이 가게 맞은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차마 들어가기가 미안했고, 두 번째 단골집은 툭하면 손님이 많아 앉을자리가 없어 보여서 세 번째 단골집을 찾아야 했는데, 줄곧 눈독만 들이고 있던 수제 꼬치집에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들어가는 것이 인지상정, 제법 당당히 들어가 꼬치와 소주를 시켰고 주섬주섬 가방에서 습작을 꺼내 습한 공기 속에 펼쳐 놓고 빨간 펜으로 이 문장 한 번 긋고, 저 문장 한 번 긋고, 다른 단어를 넣었다가 뺐다가 넣을까 말까 갈팡질팡하면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지. 그러고도 모자라 한 병 더 시켰다지.

before & after. 어쩜 깔끔지게도 먹고 마셨네

오랜만에 다시 열어 본 습작이었는데 꽤 괜찮았다. 술 때문이었지. 술이란 그런 것이지, 그래서 자꾸 마시는 게지. 그래서 지금도 술을 마시면서 술 마신 이야기를 쓰고 있다지. 상영회 때 쏟아진 비판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너무나 고마워서,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어 난감해서 묵혀 두었던 습작들을 꺼내 다시 손보게 된 것인데 그게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고치고 다시 꿰맬 곳들이 보여서 또 혼자 북받치는 바람에 빗속을 걷는 게 하냥 좋았다.

 

비 오는 날엔 투명 우산이 제격이고, 불빛은 빨갛게 타오를수록 좋은데 발이 아팠다. 구두를 신고 다니던 때가 있었고 그때는 툭하면 구두를 벗어서 -아무 데나 버릴 수는 없으니까- 손에 들고 아스팔트를 밟고 다녔는데 운동화를 신고부터는 발이 아파도 어떡허든 신발을 벗지 않고 집까지 가곤 했는데 이 날은 슬리퍼 사이에 낀 모래알들이 너무 아프고 거슬려서 오랜만에 맨발로 아스팔트를 밟았다. 쳇, 아스팔트... 곱게 생겨서 막상 밟으면 아픈 길, 그래서 흙길이었으면 싶었는데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스팔트를 밟은 도시인간이라 이 아스팔트가 내 흙길이겠거니 싶었다. 도시 인간의 오프로드는 아스팔트 아니면 시멘트. 도시 인간의 반딧불이는 횡단보도의 신호등. 도시 인간의 숲은 골목길. 그래서 슬리퍼를 벗었지, 사부작사부작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걸었지. 내가 운이 좋은 건, 여태 살아 있는 건, 그렇게 맨 발로 아스팔트를 걸어도 깨진 유리조각 하나 못 하나 밟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내가 로또 당첨이 안 되는 것이지. 로또를 안 사기 때문이 아니라, 비 오는 날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어도 유리 조각 하나 안 밟고, 파상풍도 안 걸리고, 그렇게 살아남는데 운을 다 써버리기 때문이지. 


나름대로 11자 걸음에 강박이 있어 그런 줄 알았는데 팔자걸음인 걸 보니 ㄴㅁㄹ, 내 팔자도 참.. 팔자다

오랜만에 아스팔트를 밟으니 좋았다. 한창 구두를 신고 다닐 땐 툭하면 구두가 망가지고, 구두가 망가지기 전에 내 발이 망가져 종종 구두를 벗고 아스팔트를 밟았었는데. 오랜만에 밟으니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다. 다만 고향이 불편하다는 게 문제. 부쩍 타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타향에 가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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