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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Oct 26. 2019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2019 BIFF 영화 리뷰]

[2019 BIFF 영화 리뷰]

대의 뒷골목을 살았던 이름 없는 여성들을 위한 만가


‘개미처럼 일하고 거미처럼 사라진’ 기지촌 여성들의 애환을 그린 전작 <거미의 땅>에 이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도 김동령 & 박경태 감독은 같은 대상, 같은 공간을 변함없이 밀도 높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조명한다. 허나 이번엔, 픽션과 논픽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으로 ‘다큐 픽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는 단지 새로운 형식의 도전에 그치지 않는다. 이 경계를 허무는 연출 형식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본질과 긴밀하게 맞닿아 주제의 구현에 충실히 복무한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마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구전동화를 들려주듯 영화의 문을 열지만, 곧 오랜 시간 ‘뺏벌’에서 살아온 실제 인물 ‘박인순’의 삶의 궤적을 따르는 다큐의 시선으로 전환된다. 그것도 잠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기지촌 여자 귀신들이 하나 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이들을 명계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들이 등장하면서,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분간이 모호해진다.
 
이제 흰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박인순’은, 어릴 적 아버지가 전쟁 통에 내다 버린 미아였다. 며칠을 내리 굶다 누군가 사준 자장면 세 그릇을 정신없이 먹고 정신이 차렸을 때는, 자장면 값을 대신 지불한 포주에게 팔린 상태였다.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할 만큼 어린 나이의 그녀가 보건증을 발급받아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포주는 그 며칠 전에 죽은 다른 소녀의 이름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렇게 그녀는 ‘박인순’이 아니면서 ‘박인순’으로 살았다.
 
이름의 오리지널리티가 상실되고 변질되는 것은 ‘박인순’이 살아온 동네도 마찬가지다. “옛날 옛날에 수락산 밑자락”은 배나무가 많아 배벌이라 불렸던 곳인데 여기에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그 인근에 마을이 들어선다. 그 마을의 이름이 ‘뺏벌’이다. ‘한번 발 디디면 빼도 박도 못하고 죽어서야 나갈 수 있어’ 뺏벌인 이 곳은, 이전의 배벌과는 위치도, 이름의 의미도 다르다.
 
엄혹한 비극과 기구한 인생들로 얼룩진 뺏벌에서는 저승사자조차 산 자와 죽은 자를 분간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사랑과 연민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고 꿈속과 현실이 뒤엉킨 여기 뺏벌에서는 바로 이 모호한 경계선 덕분에, 산 이와 죽은 이가 서로를 볼 수 있고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 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름이 없어 죽어서도 명부에 적히지 못해 이승을 떠도는 존재들이 가엾어, 어느 저승사자는 이들에게 ‘흔하고 뻔한’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희미한 존재로 살다 흔적 없이 죽은 이들에게 뚜렷한 삶의 형체를 불어넣는 스토리텔링의 제의인 셈이다.
 
뺏벌 기지촌 여성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시선의 폭력 속에서 지치고 고단한 삶을 살았으므로, 그녀들의 인생을 노래로 만든다면 아마도 같은 소절이 끝없이 반복되는 '길고 지루한 돌림노래'와 같을 것이다. 어느덧 그 '지겹고 반복적인' 노래도 한 시대가 닫히면서 함께 사라지고 잊혀버렸지만, 그 노래 속 실체와 아픔을 잊지 않고 계속 탐구하기 위하여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모든 존재와 사건들은 너무 쉽게 “옛날 옛적”이 되어버린다. 완벽한 기승전결과 재미를 갖춘 스토리만이 선택되고 ‘소비’되는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멸시받으며 비참한 매일의 일상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할 수 밖에 없었던 약자들의 인생은 외면받고 망각되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마땅한 이야기란...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에 동의와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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