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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Oct 28. 2021

6번 칸 리뷰 (엔딩이 중요한가요?)

2021 BIFF 상영작 긴 리뷰


완전히 다른 ‘나’와 ‘너’의 만남과

너로 인해 내가 변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




6번 칸이라는 공간    

 

  러시아 무르만스크행 낡은 기차의 <6번 칸>(2021)은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Seidi Haarla)와 러시아 광부 료하(Yuri Borisov)가 우연히 만나는 공간이다.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며 저속한 말들을 내뱉는 료하의 자리는 원래 라우라의 연인 이리나가 타기로 한 자리였다. 같은 공간을 함께하는 것이 괴로워 기차 안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라우라.


 그러나 북극까지 광활한 겨울을 가로지르는 대륙 열차는 밤낮을 달려야 하고, 기차의 여러 정차역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라우라와 료하 사이의 경계는 차츰 허물어진다. <6번 칸>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순수하고 강렬하게 연결되고, 료하로 인해 온전해지는 라우라의 찬란한 순간을 담은 영화다.     


라우라     


  라우라는 사실 어딘가 비어있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아직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영화는 문학교수 이리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시작한다. 초대받은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그곳에서, 집주인 이리나의 애인이자 동거인인 라우라는 그 누구보다 어색한 모습으로 구석 자리를 서성인다. 반면에 원숙하고 위트 넘치는 이리나에겐, 자신이 진정으로 속할 곳에 존재하는 충만함과 여유가 반짝인다.


  지적이고 정확한 언어 구사를 즐기는 이리나가 인용구의 원작자 맞추기 게임에서 (러시아어와 영어를 반복하며) 제시하는, “우리의 일부만이 다른 이의 일부와 만날 수 있다(Only parts of us will ever touch only parts of others)”는 문구는 마치 하나의 전언 같다―‘나’와 ‘너’가 만나 나눌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일부일 뿐이고, 한 때일 뿐이야. 앞서 그녀는 파티 손님들에게 라우라를 ‘하숙생’으로 소개했다.     


  격정적이었을 섹스 직후에도 라우라의 얼굴은 황량하다. 가쁜 숨을 가다듬는 이리나가 몸을 비키자 어떤 쾌감의 흔적도 없는 라우라의 표정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차라리 오래 길 잃은 이의 피로감에 가깝다. 무슨 연유로 그녀의 얼굴에는 젊음의 당찬 생기라곤 없는지. 낯선 타국의 이방인으로 겪었을 외로움과 고립감도 무관치 않겠지만, 가장 근본적 원인은 그녀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대체로 그녀는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이리나와 주위 상황에 휘둘려 결정하며 자신의 마음을 소외시킨다.      



  암각화를 보기 위해 러시아 최북단까지 향하지만, 애초에 암각화를 보길 원했던 건 그녀가 아닌 이리나였다. 이리나가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혼자라도 보고 오라 등 떠밀 때조차 라우라는 ‘노(No)’하지 못한다. 료하를 견디지 못해 짐을 챙겨 기차를 내려서도, 전화기 저편의 이리나가 “그새 돌아온다는 건 아니지?”라고 말하자 금방 기차로 돌아가려던 참이라고 얼버무린다.   

 


  원하지도 않았건만 되돌아갈 수조차 없는 여행길에서, 설상가상으로 같은 칸에  젊은 남자는  꼬부라진 국뽕(위대한 나라 러시아!) 저속한 성희롱 발언 일삼고. 차창  설경 속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라우라가 피신할 곳은 워크맨과 식당칸이 고작인데, 그녀의 질색과 혐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식당칸까지 쫓아오는 남자에겐 한낱 무력한 방어막일 따름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영화 속 여러 힌트를 근거로 추정되는 시간적 배경은 스마트폰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1990년대 후반 무렵. 생활 속 모든 소통과 교류가 대면과 유선전화로 이루어지던 시절, 좁은 기차 칸을 공유해야 하는 두 사람에게 서로는 외면할 수 없는 대상이지 않았을까.      


료하     


  영화 내내 료하는 한결같은 인물이지만, 라우라를 따르는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그의 존재감은 전복적으로 변화한다. 첫 대화에서 이미 눈살이 찌푸려진 라우라에게, 료하는 핀란드어로 ‘사랑해’가 무엇인지 묻고 그녀는 살짝 짖꿎은 표정으로 ‘엿 먹어’를 말해준다. 그러자 그 엉뚱한 핀란드어로 대뜸 사랑을 고백하는 료하... (확실히, 불청객 혐오남으로부터의 호감은 타국에서 모국어로 듣는 욕설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는 라우라의 반경 속으로 료하는 때때로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예상을 배반하고 그녀를 지켜준다. 그리고 기차가 하룻밤을 정차하게 되었을 때, 함께 자신의 친구를 만나러 시내 마을로 가자며 라우라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데려가는 데 성공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료하가 라우라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었던 친구는 자신의 할머니였다. 솔직 담백하고 유머러스한 성품의 할머니는 라우라와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지금껏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지탱시켜 준 짧고 선명한 경구(警句)를 알려준다.  “네 안에 있는 여자 동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네 속의 여자 동물과 친해져야 해. 난 지난 40년간 내 안의 여자 동물과 친하게 지냈고, 그게 지금껏 내가 행복하게 살아온 비결이야.” 첫 모금에 입 안이 얼얼해지는 독한 러시아 전통주처럼 심플하고 강렬하며 꾸밈없이 들어오는 메시지. 영화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환히 채워지던 라우라의 표정에서, 비로소 그녀가 이리나의 세계와 자기 소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욕망의 만족'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적 준칙이다. 내가 속한 수많은 유형의 관계와 공동체들이 주입한 '성숙한' 욕망(타자의 욕망, 의무감과 혼합된 욕망)이 아니라, 내 안의 순수한 날 것 드대로의 욕망을 따라야 한다고. 이를 위해, 문명이 가두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할머니가 표현한 내면의 '동물'은, 문명으로 대변되는 '이성'의 영역―언어로 체화된 모든 사회문화적 질서와 규범, 지식과 이념, 관습과 상식 들―이전에 존재하는, 그러나 이 모든 인식 체계에 억압되어있는 자기 본연의 욕망과 동류인 듯하다. 분석과 계산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고, 정교한 언어와 현학적인 의미부여가 불필요한 코어의 단계. 내가 그냥 나인 영역.

  

  인류도 한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지금 여기의 생에 충실한 유인원이었듯, 내가 그냥 나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때로 성숙이 아니다. 라우라처럼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길 잃은 '착한 어른'일수록. 다시 '아이'가 되고 '동물'이어야 한다고, 겨울밤 이국의 외딴 마을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가 그녀를 일깨워준다.

(게다가 맛있는 음식과 술에 따뜻한 잠자리까지 제공해 준 요정 할머니)

 


  이토록 멋진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자이자 그런 할머니를 좋은 친구라 칭하는 남자를 어떻게 계속 경계할 수 있을까. 다음날 지독한 숙취 속에서 엉망진창의 몰골로 깨어난 라우라는 훤히 밝은 창밖과 기척 없는 집안에 혼비백산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료하의 모습에 안도한다. 장작을 패고 있던 료하는 라우라를 보자마자 말한다. “우리 늦었어!” 라우라가 깰 때까지 나이 든 할머니를 위해 장작 하나라도 더 쌓아주려 분주했던 료하의 진심이 엿보이는 한마디.


  료하는 매사 짧고 투박한 표현 일색이지만, 특유의 강렬한 눈빛과 씩씩한 행동에 솔직한 마음이 투명하게 비치는 인물이다. 그의 거친 표현과 외양에 대한 거부감의 벽이 걷힌 후, 료하 내면의 순수한 소년을 알아본 라우라 안의 소녀가 장난스럽게 웃고 투닥이기 시작한다.     


라우라의 세계 / 료하의 세계     


  자기와 다른 존재가 되길 원하고 자기가 속하지 않는 세상을 욕망한 라우라의 내면이 꼬불꼬불한 곡선의 세계라면 료하의 세계는 평평한 직선이라서, 라우라의 언어와 세계를 료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이 료하보다 라우라가 더 현명하다는 의미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 만큼 라우라는 타인의 욕망 역시 정확히 보지 못한다.


  기차에 다시 오른 후 라우라는 복도에서 한 남자 승객을 우연히 마주치는데, 같은 핀란드인이란 공통점에 6번 칸 동석을 허락하지만 료하는 첫눈에 그를 경계한다. (가죽 손가방이 멋지다는 핀란드남의 칭찬과 동시에 재빨리 손가방을 품 밑으로 욱여넣는 료하의 경계심과 거부감은 너무 단호해서 웃음이 날 정도다.) 끊임없이 기타를 뚱땅거리며 영어팝송을 뇌까리던 이 수상한 자아도취남은 결국 기차를 내릴 때 라우라의 캠코더를 훔쳐 사라진다.


(료하가 “핀란드 새끼들은 다 죽어야 해!”라고 외치게 만든 도둑놈 역(役)은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이 했다.)



  사람에 대한 현명한 직관과는 별개로, 암각화를 보러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까지 떠나온 라우라를 료하는 사실 이해할 수 없다. 처음에 라우라의 국적도 잘못 짐작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암각화(петроглиф)’란 단어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외지 못한다. 러시아 광부인 료하의 (인식) 세계가 고고학 전공의 핀란드인 유학생 라우라의 세계를 조금도 담지 못함을 암시하듯이.


  료하의 잠든 얼굴을 유려하게 스케치한 그림을 라우라가 선물했을 때, 료하는 그녀와 자신 사이의 간극을 알아차린다. 라우라가 주소를 교환하자고 하자, 아무 의미 없는 짓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뒤쫓아간 라우라가 입을 맞추며 “나도 네가 좋아”라고 고백하지만, 그녀를 거부하는 료하의 굳은 얼굴엔 상처 받은 눈빛만 형형하다.     


  우연히 ‘엄마’의 부재가 일깨워진 장면에서도 료하는 잠시 비슷한 눈빛을 한 적 있다. 아마도 유일한 가족이 할머니뿐인, 가난하고 못 배운 료하는 자신의 얼굴을 정확하고 세련되게 그려낸 라우라의 그림에서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마주했는지 모른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우연히 동행이 되었지만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면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순리를 어른 료하가 모를 리 없으니까.


  라우라가 잠든 사이 기차는 무르만스크에 도착하고 그녀가 깨어났을 때 료하는 이미 기차를 내리고 없다.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진 료하의 빈자리가 남긴 부재감은 라우라에게 더할 수 없는 쓸쓸함을 안기고, 기상악화로 암각화를 보러 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라우라는 료하가 일하는 광산으로 찾아가 호텔 연락처와 메시지를 남긴다.     


  폭설 때문에 암각화를 보지 못하게 됐다는 라우라의 메시지에, 료하는 다음 날 당장 호텔로 찾아온다. “그거 보러 가야지! 넌 그걸 보러 여기 왔잖아.” ‘암각화’란 단어를 제대로 발음조차 못하지만, 돌에 그려진 옛 그림을 보려고 1,940여 km를 여행하는 라우라를 이해할 수 없지만, 모든 수단과 인맥을 동원해서 휘몰아치는 폭설과 빙하를 헤치고 암각화가 있는 곳까지 그녀를 데려간다.


  마침내 라우라가 마주한 암각화는 주의 깊게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만큼 작고 초라해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라우라의 표정은 신기하면서도 허탈하고 담담하다. ‘고작 이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의 여운. 그런 표정도 잠시, 라우라는 암각화도 북극의 추위도 금세 잊고 료하와 새하얀 눈밭을 맘껏 뛰고 뒹군다. 신난 개구쟁이들처럼.    

 


  어떻게 하면 료하처럼 할 수 있을까? 료하는 자신이 이해하거나 품을 수 없는 영역까지 모두 포함하여 라우라를 사랑하고 그녀가 원한다고 표현한 모든 것을 존중한다. 게다가 단순 명료한 성격의 그는 항상 ‘지금’을 온전히 산다. 무르만스크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우라의 어깨에 기대 기분 좋게 잠을 청하는 료하의 얼굴엔 몇 시간 후의 이별에 대한 어떤 예감이나 슬픔도 보이지 않는다. 료하의 현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풍성해서 예정된(혹은 계산된) 미래가 끼어들 틈이라곤 없다.


(일요일의 해가 지기도 전에 월요일에 대한 우울과 불안을 미리 겪느라, 아직 남아있는 휴일의 행복을 스스로 박탈당하는―미래의 침범과 영향력 앞에 종종 무기력한 나의 현재는 얼마나 대조적인지)


  늘 현재를 사는 인물이라서일까. 그는 어떤 순간에도 라우라를 깨우지 않는다. 언제나 그녀가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남겨둔다. 그로써, 원치 않는 작별의 인사도, 기약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도 남기지 않는다.     


  광산 입구에 멈춘 차 안에서 홀로 깨어난 라우라의 옆자리에는 이미 료하가 없다. 황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자 광산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광부들 틈 속에 걸음을 멈춰 선 료하가 있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라우라가 탄 차를 멀찍이 바라보고 있는 료하의 아이 같은 눈은 온통 슬픔이다. 라우라가 차 문의 손잡이를 열려는 순간 운전사가 차에 오르며 “호텔로 가면 되나요?”라고 묻고, 라우라는 반사적으로 “네”라고 대답해버린다.


  결국 차는 출발하고 운전사는 뒷좌석의 라우라에게 료하의 쪽지를 건네준다. 작은 종이에 그려진 삐뚤빼뚤한 라우라의 얼굴 그리고 (러시아어로 적힌) 핀란드어 발음의 ‘엿 먹어’―오직 라우라만이 해독할 수 있는 고백. 료하로부터 멀어질수록 라우라의 얼굴은 점점 일렁이기 시작한다. 짙어지는 슬픔으로 무표정이 허물어지고 억지로 삼키는 울먹임의 사이로 섞여 드는 애틋한 미소. 누군가의 순수한 진심으로 마음이 온통 채워진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풍부하게 빛나는 얼굴.      




  왜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지금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이었을까. 그 시절에만 존재했던 시리도록 춥고 외로운 러시아의 풍경과 낡은 기차의 정취, 아날로그적 소통과 세태의 맥락에 유효한 서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지금은 중년에 접어들었을 2021년 라우라의 찬란한 기억으로 읽힌다.

  그녀가 캠코더를 도둑맞았을 때 “내 모스크바가 다 사라졌어!”라고 말하며 자기도 모르게 의미했던 것은, 캠코더에 저장된 모스크바에서의 시간이란 ‘고작’ 캠코더를 잃는 순간 상실되는 종류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것. 마치 기차에서 그녀가 찍던 스쳐가는 풍경처럼. 그러나 료하와의 시간은 그런 식으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가장 진실하고 순수하게 연결된 시간, 자신의 있는 그대로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은 기억은 눈과 마음에 새겨지는 법이니까.   

  

  마지막에 라우라가 지었던 울 듯한 미소와 료하의 한없이 슬프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헤어지는 게 너무 슬픈데, 료하의 아이 같은 고백이 귀엽고 기쁘고 한편으론 웃펐을(욕설이 그토록 애틋한 고백일 수 있다니) 그녀의 심정을 자주 헤아려보게 된다. 호텔로 돌아간 라우라가 이후에 료하와 재회했을지 / 하지 않았을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어서, 더 많은 여운이 남는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변수와 장벽들이 비관적 짐작을 부추기지만, 어떤 순간에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은 료하와 마찬가지로 라우라 또한 자기 마음속 료하와 헤어진 적 없을 것이다.      


  사실 그들의 엔딩이 무엇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영화가 시작하고 줄곧 공허했던 그녀의 얼굴이 해맑게 변했고 끝내 뜨겁고 풍부하게 채워졌다는 것. 료하를 만나 그녀 인생의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발생했다는 것. 사람과 사람이 우연히 만나 그토록 강렬하고 순수하게 연결되는 사건 자체, 이름 모를 타인과의 만남이 종국에 남기는 빈자리의 상실감마저 인생의 드문 기적 아닐까.

  모든 여행에 끝이 있듯, 인생의 여러 구간에서 우리는 곁의 소중한 대상들과 하나하나 작별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언젠가 상실될 운명이다(캠코더도, 기억도, 생명도). 그러나,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소설에서 표현했듯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인생에서 ‘엔딩’이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건 엔딩까지의 순간순간을 빛나게 ‘사는’ 것일 테니까. 라우라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료하를 만났고 채워졌으며 유일무이한 감정과 기억을 자기 존재에 새겼다. 료하로 인해 채워진 존재의 따뜻함으로 라우라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테다. 바라건대, 자기 내부의 여자 동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을.


  




며칠 전, 올해 칸영화제에서 첫 상영되었던 <6번 칸>의 관객 반응 영상을 우연히 봤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엔딩곡의 리듬에 맞춰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의 모습.. 10월 8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6번 칸>을 본 후 조용한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혼자(?) 삼켰던 감격이 공감받은 기분. 비록 다른 시공간이었지만 마음이 울컥했다.     


[6번 칸의 칸영화제 상영관 영상.....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동안]


영상을 보자마자, 저 시공간으로 워프 해서 저들과 함께 맘껏 박수 치고 싶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6번 칸>은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주위 관객들과 함께 신나게 박수 치고 싶은 종류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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