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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Oct 26. 2019

<나는 집에 있었지만..>

[2019 BIFF 영화 리뷰]

 


가장 거짓 없는 표정, 무표정 & 가장 윤리적인 감각, 무능감


이 정도로 윤리적인 '영화적 시선'을 경험한 기억이 없다(... 물론 나의 영화적 경험이 일천하고 기억력마저 형편없는 탓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4차 혁명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이 세상 온갖 것들은 물론, 태양계를 넘나드는 우주적 상상력과 개인의 은밀하고 엉뚱한 공상까지 한계 없이 표현해내고 있는 영화의 역동적인 유능함은 이제 '전지전능'의 수준에 이르렀건만, 앙겔라 샤넬레크 감독의 <나는 집에 있었지만...>은 영화의 신적 유능함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영화는, 말없이 집을 나가 며칠 동안 자연 속에 있다 돌아온 소년 필립과 그의 어머니 아스트리드, 어린 여동생 플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년이 집을 나간 이유나 돌아온 이유, 아스트리드가 보이는 불안의 원인을 비롯하여, 이들 가족의 력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영화는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의 시선을 빌어 '여기 지금 이 순간'을 '엿보게' 해줄 뿐이다. 그리고 엿보는 이의 시선이 의례 그렇듯, 일정 거리에서 일부의 상황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마치 카메라의 앵글과 거리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체험하고 종국에 깨닫길 원하는 것이 바로 '보는 자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감'인 것처럼.
 
하지만 오해하지 마셨으면 한다. 자칫 '무능'이라는 단어가 지닌 부정적 빛깔로 이 영화 자체가 게으르거나 불친절하다는 왜곡된 인상을 받지 않으시길. 오히려 그 반대니까. 비록 끝은 '무능감'일지나, 그 과정은 영화적으로 너무나 성실하고 섬세하며 정교하니까. 역설적이게도 보는 이의 내면에서 깊어지는 무능감만큼, 영화에 대한 신뢰감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이 영화 속 모든 쇼트와 앵글, 초점과 프레임, 대사와 연기, 소리와 편집에 이르는 모든 측면 중 이유 없이, 윤리적인 고려 없이 선택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신뢰감. 이 영화는 모든 디테일에서 필사적으로 윤리적, 미학적이고자 했으며, 그것을 이뤘다.
 
하나 같이 무표정한 인물들이 조각상이나 가구처럼 각자의 위치에 배치되어 최소한의 대사와 움직임만을 드러내기에, 그들의 가려진 감정과 내면을 공감하거나 짐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롯이 홀로 있는 시간, 생각에 잠긴 나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거울로 보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얼굴 또한 그렇지 않을까? '표정 없는' 얼굴. 혼자 있을 때, 우리는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일 때, 표정은 때때로 대화의 상대와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구사되는 '페르소나(가면)'가 되기도 한다.)
 
인물의 시선 역시 막막하다. 뭔가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만, 그들이 시선이 도달하는 지점은 늘 화면 밖에 있다. 그들이 보는 대상이 무엇인지, 정말 뭔가를 보고 있긴 한지, 관객으로선 알 수가 없다. 관객에게 허락되지 않는 이 화면 밖 미지의 세계는, 오직 화면 속 그/그녀의 시선만을 허락한다.
 
비단 관객에게만이 아니다. 이러한 '시선'의 제한과 단절은 영화 속 인물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의 단독 쇼트에 갇혀, 대화를 하고 있어도 서로의 시선을 돌려받는 경우가 드물다. 한 쇼트에 여러 인물이 함께 등장하기도 하지만, 삼각형이나 마름모의 꼭짓점처럼 포지션을 취하고 있으며, 그들의 시선은 교환되지 않고 서로를 비껴간다. 침대에 누워 가장 내밀한 대상과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 카메라는 말하는 이의 얼굴을 비출 뿐, 듣는 이의 표정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이는 건 오직 뒷모습 또는 뒤통수. 어쩌다 언뜻 드러나는 옆모습에서조차 표정은 결락되어 있다. 인물 간 온전한 공감의 증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한 곳에 붙박인 카메라는 움직일 수 없는 물리적 공간처럼, 인물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길 거부한다. 인물은 이따금 화면(관객의 시선) 밖으로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실재와 부재를 오가고, 아스트리드의 거실에서 그녀의 방을 향하는 화면의 시선은 벽에 가로막혀 그 내부를 비추지 못한다. 더 안쪽 깊숙한 공간으로 인물이 걸어 들어가거나 사라질 때, 카메라의 시선은  'follow(따라가다, 이해하다)'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정된 앵글과 프레임 덕분에, 관객의 '응시'가 가능해진다. '응시'란 어떤 대상을 집중해서 찬찬히 들여다보는 행위이며, 스쳐가는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 <나는 집에 있었지만...>의 공간 곳곳에는 창과 유리가 배치되어 있어, 앵글이 미처 담지 못하는 인물의 존재와 움직임을, 인물의 다각적인 얼굴과 시선을 반영하여 다양한 음미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응시'로도 이해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대상과 영역이 존재함을, 판단과 재단이 아닌 침묵의 존중만이 어쩌면 최선의 윤리적 태도임을 시종일관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고 여길 때, 어쩌면 우린  

"겉으로 드러난 표면 만을, 단지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 뿐(칼 융)"인지도.

정말 중요한 사실, 가장 진실한 감정은 어쩌면

누구의 시선과 이해가 닿을 수 없는

아주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지도.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타인과 사건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시류 속에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세상에 대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역이란 극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이며, 심지어 때로는 (어쩌면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조차 실패하는 존재임을... 겸손하게 반추해볼 일이다.
 
이 영화의 미학적 묘미들은 언어가 무능해지는 지점이며, 이 영화의 유능한 절제가 빛을 발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리뷰의 무능과 좌절이 깊어지는 만큼, 온전히 영화로만 확인할 수 있는 매력이 크다는 의미일 테니, '응시'의 준비가 된 관객이라면 영화 <나는 집에 있었지만...>이 온몸으로 전달하는 모든 요소들을 즐겨보고, '생략'된 부분들은 자기 만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구성해보는 재미를 누리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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