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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Feb 25. 2021

번아웃과 우울증

그래도 여전히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살고 있다는 것

나는 고등학교때 아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거 같다. 사실 그때는 그게 우울증인지도 몰랐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나는 나를 감싸는 법도, 내 감정을 추스리는 법도,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 아이였다. 조금만 감정을 복돋아주는 얘기만 들어도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남에게 나를 알리고 싶지도 남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학교생활에 대한 행복함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남들이 나를 알아주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나의 실수를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고, 내 자신을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돌아보니 나는 참 가여웠고 안쓰러운 아이였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나를 떠나지 않고, 내가 힘들 때마다 불쑥불쑥 나를 찾아온다. 


어쩌면 내가 너무 독립적인 아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독립적인 건지 환경이 독립적이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나의 어린날은 보호자의 옆에서보다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점 받은 성적표를 너무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을 하고 칭찬을 받을 어른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의 성적표를 확인하는 친구 엄마 옆에 가서 중얼중얼 그 얘기를 했는데, 나를 한번도 쳐다보시지 않으시고 무시하셨었다. 친구는 받지 못한 좋은 성적을 내가 받아서였을까?  다른 번에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머리를 다쳤는데, 나를 도와줄 어른이 없다는 것에 핑 도는 울음에도 꾹 참고 경비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남들보다 나에게 생긴 기쁜일이나 슬픈일에도 마냥 해맑게 좋아하거나 슬퍼하지 못한다. 문제가 생겨도 혼자 해결하는 게 익숙해 졌고, 그러다 보니 나의 우울증도 그냥 혼자 안고 살아간다. 


나는 한국을 떠나면 내가 아무런 걱정도 없이 잘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의 교육체계, 획일화된 사회, 워라밸이 없는 업무가 나의 우울증의 나의 힘듦의 이유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였다. 그래서 떠난 나라 미국에서도 나는 우울증과 무기력함에 힘들어 했다. 유학비용을 대기 힘들어하는 엄마 옆에서, 나는 내가 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천재가 아닌 내게 장학금을 줄 미국 대학교는 없었다. 학교에서 알바를 잡아서 생활비를 벌고 성적을 잘 받아서 소량의 장학금을 받아도, 나보다 적은 성적으로 괜찮은 가정환경으로 장학금을 받아내는 미국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기력 함이 시작되었다. 남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내겐 아메리칸 꿈은 너무나도 먼 얘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척 수동적인 아이로 변화했으며, 죽을 생각도 종종 했다. 현재는 그 시간을 나를 죽이지 않고 묵묵히 살아온 내게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울증을 겪으며, 나는 미국에서 쫓겨났다. 


유럽으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나는 다시 인생의 희망이란 것을 찾았다. 괜찮은 성적과 괜찮은 대외활동 덕에, 나는 독일에서 어렵지 않게 정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이랑 미국이 나랑 안 맞아서 힘들었던 걸꺼야. 나는 여기랑은 잘 맞는 사람일꺼야"라고 내게 되뇌이며 정착을 했다. 나름 나쁘지 않게 정착을 했고, 여기서 많을 것을 이뤘으며 앞가림 정도는 하고 살고 있는데, 다시 우울증이 도졌다. 이번에는 너무 바쁜 생활로 인한 번아웃이였다. 한학기 내내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풀타임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가끔은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의 연속이였다. 몇개월동안 주말까지 휴식이란 것을 가져본 것 없는 하루들이 지속되었고, 그래도 나름 잘 살아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번아웃이 찾아왔고, 나의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닌 나를 둘러싼 것들이 되었다. 내가 계획해서 하고 싶으니깐 하는 일들이 아닌, 남들이 내게 원하니깐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깐 하는 일이 늘어났고 내가 실망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자괴감에 빠져들었고 우울증이 오게 되었다. 세번째 우울증이다. 


이번 세번째 우울증을 계기로 나는 새로운 것을 배웠다. 나의 모든 우울증의 이유의 뒷면에는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항상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 나는 왜 이렇게 되지 못할까 나는 왜 더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으로 나를 괴롭혔다. 뒤를 돌아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들을 돌아보지 못한 채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었고 그리고 항상 탈이 났다. 이건 내가 어느 나라에 살든지의 문제가 아니였다. 이건 그냥 나란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 였고 내가 어쩌면 평생동안 안아주고 보듬아 줘야 하는 과제이다. 


세번의 우울증을 통해 나는 나를 더 알아가고 있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리고 주름만큼 지혜를 가진 할머니가 되어서도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내일의 나는 분명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를 조금 더 사랑할 것이고 조금 더 행복해 지게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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