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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Apr 25. 2023

여행, 40일의 기록 #1

실종 아닌 여행의 시작

2013년 가을, 스물 여덟의 나를 바라보면 심각한 우울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직장에선 3년을 채우지 못한 채 불합리한 일을 차례로 겪고 자의 반 타의 반 잡아 놓은 퇴사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귀던 연인과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헤어졌고, 집도 쉴 곳은 되지 못했다. 부모님과 최악의 갈등 아래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 모두가 나의 적이었고 패배감이라는 까만 덩어리만 안고 숨만 쉬고 버텼다.’가 적당해 보인다. 하루 한끼를 채 먹지 않으며 생존을 부지해 한달 새 6kg가 빠졌을 정도로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 안을 헤맨 나날을 살아가다 10월의 어느 날, 불현듯 스무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나중에 지금과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온다면, 혹시 그 순간 돈이 있다면 무조건 떠날 거야.' 수능을 망친 나는 나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고 가끔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한강에 가서 울고 오곤 했다.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고 ‘죽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던 시기였다. 한강 물에 발이라도 담가볼까 했지만 추워서 다시 헤엄쳐 나올 것 같고, 그럴 용기도 없이 애매한 시간을 보냈다. 지갑이 두둑해질 날을 고대하며 결심하던 그 기억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다행히도 그때는 일한 날만큼 퇴직금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숨만 쉬어도 갑갑한 이곳을 떠날 든든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나도 모르게 항공권 가격비교 사이트인 스카이스캐너를 열어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마음인지 몰라도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기 전에 이것이라도 해봐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불현듯 유럽, 그리고 햇살이 많다던 이탈리아가 떠올랐고 일주일 뒤 출국하는 로마행 비행기 티켓은 어느새 출력되고 있었다. 아무런 계획도 짜 놓지 않은 채 말이다. 


기간은 40일로 잡았다. 왜 40일이었을까? 한달은 짧은 것 같고 두 달을 버티기엔 퇴직금이 빠듯해 보였다. 돌아오고 싶진 않지만 언젠가 와야 한다면 적어도 30일 이란 숫자는 넘겨보고 싶었다. 막상 티켓을 출력하긴 했지만 마음 한 켠에 ‘괜찮을까?’ 란 마음이 올라왔다. 배낭여행 고수에게 SOS를 요청하니 아이폰 하나만 있으면 무계획 여행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기하게 이때부터 뭔지 모르게 채워졌던 불안함 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돌멩이처럼 작아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혼자만의 여행, 이전까지는 가족과 함께하거나 패키지 여행이 아니면 밖을 다닌다는 엄두를 내 본적이 없었다. 엄격한 가족 분위기 때문에 서른이 다 될 때까지 밤 12시를 넘어 집에 온 적도 손에 꼽혔는데 무계획, 그것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내 생애 첫 배낭여행’은 이렇게 며칠 만에 확정되었다.


무모함은 한번 생기면 가속도가 붙나 보다. 냉랭한 상태였던 부모님께 “일주일 뒤 여행을 갑니다.”라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실종’이 아닌 ‘여행’을 갈 것이라고 그나마 내 편이었던 동생에게만 귀띔하며 내가 사라진 날 말해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출국일 새벽 4시,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커다란 짐가방을 질질 끌며 몰래 집밖을 나섰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핸드폰을 끄고 열 세시간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중간 경유지에서는 차 한잔을 마시며 오로지 나만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회사와 실연과 가족… 모든 것은 그냥 멈춘 채 혼자서 다독이는 시간을 보내자고 되뇌고 반복했다. 


로마행 비행기는 몇시간 연착이 되고 목적지에는 짙은 어둠이 가득한 시간에 떨어졌다. 가까스로 숙소 방향 마지막 열차를 탈 수는 있었지만 불현듯 두려움이 다시 나를 감싸왔다. ‘늦게 도착한다고 전화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당시에는 지금처럼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았다. 핸드폰은 시계로 전락했고 내 손에는 지도 한 장이 끝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초조함이 나를 따라왔다. 태어나서 첫 번째 여행인데… 소매치기를 당하고 미아가 될 것만 같았다. 


안절부절 열차를 기다리던 순간, 옆자리에 서 있던 안경을 쓴 동양인 남자가 날 보고 걸어왔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는 귀인이었다. 목적지는 그와 동일했고 열차 안에서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다. 그는 로마 예술학교를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이고 이 시간에 여자 혼자 길을 다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니 친구를 불러 숙소까지 데려다 준다고, 절대 혼자 갈 생각하면 안된다 말하며 강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열두시가 다 되어갈 무렵,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친구 한 명이 합류해 노숙인 가득한 기차역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종이 지도 한 장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골목골목을 핸드폰 지도를 따라 검색 또 검색하며 숙소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다. 은인인 이들에게 답례를 하고 싶어 연락처를 묻자 그들은 쿨한 표정으로 “다음에 네가 너같이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와줘”라 말하며 유유히 떠나갔다. 


숙소까지는 무사히 도착 했지만 새벽 시간에 이국땅은 나에게 공포감 그 자체였다.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본 숙소 주인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여기서 안전하게 버티려면 너부터 다른 이들을 신뢰해야 해!”라며 본인의 핸드폰을 꺼냈고 “나는 이걸 소매치기 당한 적이 없어. 그러니 너도 이곳을, 이곳 사람들을 믿고 하루 하루씩 보내 봐.”며 단호하게 말해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주문처럼 나에게 다가왔고 어느 새 안정감이 차근히 채워졌다. ‘그래 여기 사람들을 믿어 보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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