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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영 Feb 24. 2023

불우의 명곡

불우의 명곡


불우의 명곡


창문에 걸려있던 빛은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그녀는 곱등이처럼 작고 굽은 등으로 돌아누워 앓고 있다.

어둑해져 가는 방 안에 가득찬 냄새. 낮이 다하고 저녁이 오듯 그녀의 몸에 스며들어 그녀를 잠식해 가는 죽음의 냄새.

그녀가 오래 비워둔 마당가 벤치에는​ 저승처럼 소리 없이 겹벗꽃 꽃잎들이 떨어져 쌓이고 있다.

봄은 저토록 흐드러져 쌓이고 있는데 그녀는 최선을 다해 시드는 중이다.  

엄마! 노래 틀어줄까?

그녀는 대답이 없고, 지상에서 한 발짝 멀어져 가는 그녀 등뒤로 젊은 이미자가 부르는 <애수의 소야곡>이 방 안의 어둑한 공기들을 진동시킨다.

저 노래는 멀고 먼 시간을 지나 이제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그녀에게 다시 오고 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저 노래가 그녀의 통증을 노래로 바꿔주던 날들을 기억한다.

어두운 수심(水深)을 드나들며 홀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던 그때의 그녀는 젊었었다. 여름이 식어가는 백사장, 마을 사람들에게 떠밀려 올라간 허름한 무대 위에서 까맣게 탄 얼굴 유난히 곱슬거리던 짧은 파마머리의 초라한 그녀가 부르던 노래. 막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취한 듯 우는 듯 눈을 감고 부르던 노래였다.

두 번 쏘이면 죽는다는 독, 물에 빠져죽은 처녀의 혼이라고도 한다는 그 독에 세 번째로 쏘여 물질을 못 나간 그녀가 부르던 노래이기도 했었다.

통증을 잊기 위해 소주 반 글라스를 삼키고 한쪽 팔을 이마에 얹고 눈을 감은 그녀가 울지 않기 위해 부르던 진통제 같은 저 노래. 그 노래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소년은 노래를 부르게 하는 통증의 정도나 감정, 노랫속의 옛사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섬망을 앓는 그녀에게 어젯밤에도 그제 밤에도 다녀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젊고 잘생긴 신사들이 여럿 자신을 데리러 왔었다고 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죽은 그녀의 젊은 아버지와 젊은 엄마, 내가 어려서 죽은 그녀의 남편이자 나의 젊은 아버지, 어린 날 함께 자랐지만 징용에 끌려가 뼈만 돌아온 외삼촌들도 왔다 갔다고 했다.

평생 사무치게 그리웠을 사람들이 그녀의 잠 곁에 앉았다 가곤 했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죽음을 지나면 그 옛사랑들에게 돌아 갈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노래는 아픔을 슬픔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슬픔은 아픔을 증발시켜 다시 맑은 빗물로 바꾸는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우의 시절보다 더 간절하게 노래가 필요한 시간이 있을까. 불우의 시절을 견디게 해 주고 상처받은 존재가 다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지켜주던 노래들을 나는 불우의 명곡이라 부르고 싶다.


잠에서 깬 그녀는 다시 살아있고, 감겼던 눈꺼풀을 어렵게 들어올리며 나를 바라본다. 멀고 먼 시간으로부터 그녀의 귀에 다시 돌아온 노래에 그녀는 반응한다. 처음 노래를 중얼거려보는 아기처럼 더듬더듬 노래를 흥얼거린다. 노래는 잠시 그녀를 지상에 붙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애수의 소야곡>이 흐르던 지상의 어느 작은 방안에는 이제 이미자의 <아씨>가 다음 시간을 이어간다.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그녀는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외로움에 겨울 때 고통을 홀로 견뎌야 할 때 그리움이 가눌 길 없이 쓰라릴 때 부르던 노래들은 아직도 살아서 나에게 불어온다.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고 길어, 그녀는 떠났지만 노래는 남아 이렇게 새로운 노래를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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