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첫 번째로 소개한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소비에트 연방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의 인터뷰를 담은 기록이다. 이어지는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은 러시아군이 점령한 패전국 독일의 여성이 기록한 일기이다. 구술과 일기는 지극히 사적이고 여성적인 기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구술과 일기에 담긴 여성들의 목소리는 참혹한 범죄에 대한 침묵을 허물고 여성의 기억을 역사의 영역으로 부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전쟁의 피해 중에서 가장 먼저 삭제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집단 강간은 적과 동지 혹은 승전국과 패전국의 구분 없이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모든 곳에서 은폐된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은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의 봄, 러시아군이 점령한 독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집단 강간에 대한 기록이다. 훗날 '베를린의 여인'으로 불리는 '익명의 여성'은 동부전선에서 밀고들어온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20일부터 연합군이 베를린을 두고 협상하기 전인 6월 22일까지 베를린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한 일을 일기로 기록하였다.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했을 당시, 도시에는 270만 명의 민간인만 남아있었고, 그중 200만 명이 여성이었다. 전쟁이 계속된 6년 동안 남성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1945년 봄, 베를린은 여자만 남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점령 기간 동안 베를린의 여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독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집단 강간은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전체에서 최대 100만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으며, 베를린에서만 9만 5천 명에서 11만 명의 피해자를 발생했다고 한다.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당했음에도 승전국이나 패전국 모두 '베를린 집단 강간'에 대해서는 침묵해왔다. 나치를 끝장낸 영웅적인 '붉은 군대'(소비에트 연방군)의 성범죄는 들추어내지 말아야 했고, 전범국가 독일의 피해는 차마 이야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몇 겹으로 포위하자 패배를 실감한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에 권총으로 자살하고, 독일군은 5월 9일 연합군에 항복한다. 베를린의 함락으로 2차 세계 대전은 끝을 맺게 되지만, 그 기간 동안 베를린 여성들은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익명의 여성이 써 내려간 일기는 패전국 여성에게 가해졌던 끔찍한 폭력에 대한 기록이자 굶주림과 두려움, 절망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생존기록이다.
4월 27일, 금요일 새벽.
러시아군이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들은 폐허를 이 잡듯 뒤져 여자를 겁탈한다. 러시아군 장교들은 ‘그 일’을 사병들에게 금지했지만, 전시 강간은 하급 병사만 하는 게 아니다. 독일 여성을 지켜주는 독일 남자는 없다. 구조를 위해 이웃집 문을 두드릴 때 풀지 않은 문의 안전고리 뒤에서 “우리까지 시달리고 싶지 않아요!”라고 속삭이는 남자는 신사다. 러시아 병사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여자를 향해 어떤 남자는 이렇게 외쳤다. “제발 빨리 따라가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잖아요.” 나는 몰락하는 서구에 대한 주석을 쓰고 있다. (책 중에서)
이 일기는 1954년에 'A Women in Berli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8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독일어판은 2003년 'Eine Frau in Belin'라는 제목을 달고 익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후 '또 다른 서재' 시리즈를 통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원고의 진위와 저자 신분과 관련된 논쟁이 있었지만, 2004년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진짜 수기임이 판명되었다. 2008년에는 니나 호스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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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베를린 여성 집단 性폭행-2차 대전 당시 피해 첫 주장 / <중앙일보> 1995.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