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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빈 Mar 18. 2022

실패의 면역

멋진 실패를 이루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


점수 미달 탈락입니다!
주차 시간 초과 실격입니다!


탈락을 전하는 목소리가 이렇게 경쾌해도 되는 건가? 올해는 운전면허를 꼭 따고자 학원을 등록하고 의지를 불태웠다. 회사 밖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경험은 꽤 오랜만이라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30대가 되어 ‘선생님’이라는 말을 내뱉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처음 세웠던 계획은 3월 초 기능 시험 합격! 3월 말 도로 주행 합격! 이 글을 쓰는 지금은 3월 18일. 내가 합격한 시험은 오직 필기뿐이다…


그렇게 기능 시험을 두 번이나 떨어지고, 삼수생이 되어버렸다. 교육 시간에 코스를 쉽게 완주했기에 당연히 바로 합격할 줄 알았는데. 첫 시험 전날, 꿈에 나올 정도로 계속 시험 관련 유튜브 영상을 돌려 보고 주차 공식과 코스를 외웠다. 시험날에는 무려 40분 일찍 도착해 대기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40분 동안 화장실도 두 번 다녀왔으니 말 다 했다. 땀이 나서 끈적해진 손으로 핸들을 잡았지만, 긴장한 탓에 첫 좌측 깜빡이를 까먹어서 감점. 주차하다가 선 밟고, 시간 초과로 실격!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 멍청아!를 속으로 열 번 정도 외친 것 같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번째 시험을 앞두고선 운전 시뮬레이터 연습장에 갔다. 액셀과 브레이크 감도가 다르고, 내가 시험을 치는 곳의 코스도 없어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노력을 했으니 안 한 것보단 결과가 좋을 것이라 나를 달랬다. 대망의 두 번째 시험 날, 폭우가 내렸다… 시험장에 갈 때는 멀쩡하던 하늘이 내가 도착하자마자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사이드미러가 잘 보이지 않아 당황해서 코너를 돌다 중앙선을 밟고, 주차선을 밟고 실격했다. 또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분에 찬 눈물이었다. 몰래 눈물을 닦다 버스 안 거울에 비친 나를 힐끔 보는데 참 가관이었다. 서른두 살 먹고 면허 시험 떨어져서 눈물 흘리는 꼴이란…


충분히 우울해한 후, 사소한 일에도 언제나 조급해하고 울분을 터트리는 내가 어김없이 싫어졌다. 궁금했다. ‘살면서 제대로 넘어져 본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여유가 없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삶에서 ‘탈락’한 적이 별로 없었다. 입시도, 취업도 한 번에 패스했다. 속앓이 할만한 굴곡이 없었다. (연애는 많이 실패했지만 예외로 두겠다.) 오히려 그래서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여유가 없는 건 실패에 대한 면역이 부족해서라는 결론에 닿았다. 실패를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후 마음을 어떻게 다져야 하는지 몰랐다. 실패할 것 같으면 일단 요리조리 도망가고, 실패 후에는 나를 탓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잘 실패할 줄 모르는 사람’.


퇴근 후 집에 돌아온 S에게 시무룩한 얼굴로 두 번째 탈락 소식을 전했다.

“남들 다 있는 운전면허 시험도 못 붙네 나는. 그냥 안 할래. 해도 안 되는 사람인가 봐.”


S는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한 번 따면 평생 쓰는 자격증이니까 당연히 어렵지. 괜찮아 다시 하면 잘할 거야.”


여유롭게 실패할 줄 아는,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S의 말을 듣고 순간 멈칫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와 나의 언어는 달랐다. 내 울분의 방점은 ‘남들은 쉽게 하는’, ‘남들이 다 하는’에 찍혀 있었지만, S는 ‘노력해서 이루면 평생 쓰는’을 강조했다. 나의 모든 노력과 결과에는 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그는 남을 빼고 얘기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성장 드라마를 좋아했던 나는 실패 부적격자로 성장했다. 숱한 성장 드라마 속에는 악역을 맡은 라이벌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나가는 라이벌의 존재는 필수였다. 라이벌과의 경쟁, 마지막 승부, 짜릿한 성장!  인생도 그러한 성장 드라마일  알았는데, 그렇게 되길 바라 왔는데 역시 현실과 드라마는 달랐다. 주인공처럼 역경을 이겨내며 무조건 성공하지도 않을뿐더러,  인생에서 악역을 맡을 라이벌은 건강한 동력이 되지 않는다.


실패에 대한 면역을 키우기 위한 첫 단계로, 앞으로 내가 직접 써나갈 성장 드라마에서는 ‘남’을 지워나갈 예정이다. 남들이 어떻든 나의 과정과 결과에만 집중하고, 만약 실패한다 해도 타인의 성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싶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더 많은 실패를 이루어 내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능 4수는 좀 곤란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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