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에 몰린 어른들의 영어 수업
일주일에 세 번, 아침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영어 수업을 듣는다.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영어 학원 등록이었다. 지금껏 여행에서 만난 친구에게 당신의 특별함을 영어로 완전하게 전할 수 없었던 답답함, 앞으로 더 넓은 곳에서 일하고픈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제1의 계획. 한국에는 영어 학원이 정말 많다. 학원뿐 아니라 인터넷 강의, 앱, 전화 영어, 라디오 등… 솔직히 한국은 ‘의지’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는 영어 교육 공화국이다. 하지만, 그놈의 의지가 늘 문제.
32년 동안 살아오며 내 의지의 유효기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교육을 열심히 찾았다. 비대면보다는 대면 강의를 진행하는 학원, 성실히 매일 공부해야 따라갈 수 있는 커리큘럼, 조금은 강압적으로 학생들을 끌고 가는 곳. 이 세 개 조건을 만족하는 학원을 드디어 발견했다. 학원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만만한 과정이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마세요. 재수강은 불가능합니다.” 완벽한 곳이다! 수험생 같은 일상이 시작됐다.
꽃이 흩날리는 요즘, 학원 문을 열면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성인만 수강하는 학원이기에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촘촘하게 모여 앉았다. 그들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잔뜩 진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커다란 백팩, 백팩 주머니에 꽂혀 있는 텀블러, 뒤집어쓴 후드 티와 구겨 신은 운동화.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구 반대편의 언어 때문에 벼랑에 몰린, 가장 절박한 어른들이 모인 공간 같다. 마치 노량진역에서 지친 얼굴로 열차에 올라타는 이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수업 시간은 내가 경험한 그 무엇보다 엄숙하고, 불편한 책걸상은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대는 소리를 낸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많은 이들이 불편한 책걸상에 엎드려 짧은 잠을 청한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사람들을 슬쩍슬쩍 훔쳐본다. 매일 덴마크 요구르트 딸기맛을 먹는 저 친구는 어떤 사연 때문에 여기로 왔을까? 저분은 40대 중반처럼 보이는데, 직장 때문에 공부하는 걸까? 함께 수업을 듣는 30대 부부는 이민을 준비하나? 매일 그 많은 과제들을 해내고 아침부터 이곳에 모인 이들의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하다. 하지만 저마다의 절박함으로 무장한 어른들에게 명랑하게 먼저 말을 건넬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쉬는 시간과 수업을 세 번 반복하면 일정이 끝난다. 나는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감사합니다’를 대신하는 박수를 친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을 먹지 않아 뱃속은 요동치지만, 그럼에도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는 벚꽃 나무로 둘러싸인 하천이 하나 있는데, 이사한 직후에는 한 달 동안 길을 몰라서(지독한 길치다) 하이힐을 신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하천의 돌다리를 건너 귀가한 적이 있다. 불편하고 느릿한 그 길에 역정을 냈었는데, 요즘은 일부러 그 길을 자꾸만 찾게 된다.
나의 절박함이 무장해제되는 순간은 그때다. 돌다리를 건너는 순간만큼은 시간이 온화하게 흐른다. 엄숙했던 학원의 공기와 눈앞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이 교차하며 마음의 리듬이 달라진다. '이렇게 한다고 과연 될까? 해낼 수 있을까? 안 되면 어쩌지?' 매분 매초 나를 옥죄는 생각들이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거칠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들에게는 '꼭 해낼 거야'라는 다짐보다 마음의 환기가 필요하다. 물론, 집에 도착하면 주어진 과제를 하느라 말없이 책에 코를 박겠지만.
매주 만나는, 사연이 궁금한 이들도 가끔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자리에서 꽃을 보고 있을까?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영영 모를 테지만, 그러기를 빌어본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결국 봄을 마주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