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차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건 진심뿐이었다.
어떻게 복수할까 며칠을 고민했다. 온갖 모진 말(쌍욕)을 준비해 갈까,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뺨을 후려칠까, 인터넷에 폭로 글을 올릴까. 다섯 달 동안 만난 그에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단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해 동안 별별 나쁜 연애를 해봤지만, 이번이 최악이었다.
그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짐작은 했었다. 만나지 않는 날엔 연락이 잘 안 됐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자주 했다. 근데 좋아해서 내가 모른 척했다. 어쩌다 물증을 손에 넣었을 때, 손이 덜덜 떨렸다. 예상했다 해도, 두 눈으로 확인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내가 네 명 중 한 명이라고? 너 연기자야? 내게 했던 말들은 뭐야? 그 눈빛은?’ 할 수 있는 건 좋았던 순간을 되새기며 상처를 후벼 파는 것뿐이었다.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지만, 전화로 간단히 끝내는 게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그를 만나기로 한 날까지 아무 내색하지 않고 복수를 준비했다.
드디어 디데이. 뻔뻔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에게 웃으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나 다 알고 있었어. 너 다른 여자들 만나는 거. 처음에는 화나고 속상해서 참을 수 없었어. 널 어떻게 할까 계속 고민했어. 근데 있잖아, 나는 네 행동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지만, 넌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결과적으로 나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따지고 때리고 몰아세우고 싶었는데, 그러면 정말 후련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일을 벌이면 그와의 또 다른 사건을 만드는 것이 되고, 기억은 진해져서 더 오래 남을 거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펑펑 주는 것도 내 마음에 흉터를 남기는 일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얘기하자, 그는 잠깐 당황하더니 프로 쓰레기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 ‘전여친에게 연락이 와서 잠깐 만났다. 미팅은 심심해서 나간 거였다. 난 그래도 네가 좋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할 걸 알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그때 잘 지내라 단호하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면 깔끔했을 텐데.
나는 구구절절한 그의 얘기를 들으며 희망을 품었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그날,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 나만 좋아해줄 수 있냐 물었다. 그는 망설였다. 그가 나쁜 놈인 걸 아는데도 내가 줄 수 있는 건 진심뿐이었다. 과거, 홧김에 센 척을 하거나 상대를 짓누르며 관계를 정리하면 늘 후회가 남았다.
‘그때 내가 화내지 않았다면 더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계속 만났다면 그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당시에는 다친 마음에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희미해진다.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다시 뚫고 나온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번번이 무너졌었다. 그런 식의 후회를 견디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이번에도 구차하지만, 마지막까지 좋아하는 마음을 쥐어짜내 건네는 게 날 위한 방법이었다. 컨트롤할 수 없는 마음은 빨리 소진해버리는 게 유일한 답이니까. 며칠을 더 연락했지만, 그는 그대로였고 우리는 끝이 났다. 하지만 감정 앞에서 사람은 미련해서 나는 마음이 해질 때까지 진심을 주고도 많이 흔들렸다.
연락하고 싶고 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달랬다. ‘만약 그를 계속 만난다고 치자. 올해 마지막 날 돌아봤을 때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까? 곁에서 상처받으며 나를 학대하는 거잖아. 결정적으로 그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 아침에 눈떠서 잠들기 전까지, 내 마음을 돌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미친 사람처럼.
지난 명절, 나처럼 엉망진창 연애를 막 끝낸 친구와 바다 옆에 있는 절에 다녀왔다. 제발 온전한 연애를 하게 해달라고 종이에 소원을 쓴 후 볏짚에 매달았다. 사실 마음속으로 그의 앞길도 빌어줬다. 그가 제대로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방법을 알아 행복해지기를. 3월 1일, 절에서 소원 종이를 매단 볏짚을 태운다고 한다. 볏짚이 불타올라 사라지면, 우리는 더 편안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