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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Apr 10. 2021

각본 실습, 내 인생의 첫작품 쓰기

12. 대본 초고 작업

챕터 10. 대본 초고 작업


여러분이 씬 시놉시스 혹은 트리트먼트 작업을 완료했다면 드디어 대본을 쓸 차례입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대본을 쓰기에 앞서 우리는 극대본의 본질적인 특성 하나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특성을 이해하고 나면 극작가가 대본을 왜, 그리고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스토리를 공통적으로 다루는 소설의 작법과 극대본 작법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소설은 스토리 위주로 작가가 정한 관점에서 사건을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과 상황을 비교적 자유롭게 기술할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들은 처음부터 작가의 관점과 화법을 받아들이고 작가가 인도하는 길로 쉽게 들어섭니다. 소설을 이렇게 ‘작가의 관점과 화법에 따르는 창작물’로 볼 수 있다면 극대본은 스토리를 얘기하는 창작물인 동시에 ‘영상 제작 지시서라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대본이 ‘영상 제작 지시서’라는 의미는 극대본이 배우에게 행동과 말을 지시하고(여기서 지시라는 단어가 일방적인 ‘명령’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연출과 스텝들에게는 촬영의 제반 상황들을 지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극대본은 촬영(프로덕션)에 대한 디테일을 표현할 뿐 아니라 편집이나 그래픽, 음악과 음향효과 같은 후반 작업(포스트 프로덕션)에 필요한 디테일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극대본은 작가가 영상물의 최종 결과물을 사전에 예측하여 기록해 놓은 ‘종합 영상 제작 지시서’라는 전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극대본의 이런 전문적인 특성 때문에 각본 작업은 반복과 숙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각본 작업을 설명하는데 ‘설계도’나 ‘구축’ 같은 공학적인 단어가 동원되는 것도 극대본의 이런 영상 제작의 전문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사람의 극대본 작가가 완숙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영상 완성 경험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쓴 대본이 많은 사람들의 협업을 통해 어떻게 영상화되는지 제작의 전 과정을 여러 차례 겪어야 완성도 높은 극대본을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전문가든지 신인 시절이 있고 숙련의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능수능란한 전문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작가가 지금 쓰고 있는 대본이 어떤 것인지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쓰기만 하다가는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불필요한 소모와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신이 쓰고 있는 극대본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극대본이 ‘종합적인 영상 제작 지시서’라는 본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번에는 효율적인 대본 초고 집필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초고 작업을 할 때 저는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쓰는’ 방법을 권합니다. 극대본은 완성고가 될 때까지 수많은 수정 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초고 작업을 할 때는 모든 씬을 완벽하게 완성하고 넘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 써지지 않는 씬은 그냥 넘어가고 자신이 잘 쓸 수 있는 씬들을 먼저 완성하는 방식으로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쓰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못 썼던 씬들을 내려씁니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면 여러분이 첫번째, 두번째... n번째로 대본을 내려쓸 때마다 작품을 이해하는 깊이가 더 깊어지고 대본을 쓰는 실력도 조금씩 더 성장해가면서 이전에는 쓰지 못했던 씬들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또, 사이 사이에 이미 완성된 씬들이 있기 때문에 작업이 점점 쉬워지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작업해서 모든 씬들을 완성되고 나면 여러분의 초고 작업은 끝이 난 것입니다.     


두번째로 초고 작업에서는 작품의 초기부터 꼭 쓰고 싶었던 핵심 씬들을 쓰는 데 전력투구하십시오. 작가가 ‘내 드라마(영화)에서 이 씬만큼은 꼭 있어야돼!’하고 생각했던 씬들 말입니다. 이런 씬들은 작가의 작의를 드러내거나 영상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기 때문에 이 씬들을 기준점으로 삼아 다른 씬들을 배치하고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착한 악마>를 예로 들자면 아버지 정원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남몰래 뱀파이어가 되는 씬을 먼저 완성한 후 그 앞뒤 씬들을 마저 완성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씬이 의도한 대로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써놓았던 것을 모두 지우고 새로 쓰십시오. 이 때는 씬의 완성도를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 씬에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모두 지운 후 다시 쓰기를 거듭하십시오.     


네번째로 초고 작업을 할 때는 등장인물의 행동/감정 지문을 지나치게 상세하게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인물의 대사마다 매번 지문을 쓰기도 하는데요, 초고에서는 지문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지문은 인물의 행동을 직접 지시하는 직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의 표현 범위를 제한하는 나쁜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이후의 대본 작업에서도 지문은 필요할 때만 최소한으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작가는 씬의 상황 묘사만으로도 배우가 대본의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상황 묘사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다섯번째로 대사를 쓸 때에도 그 씬의 등장인물이 꼭 해야 하는 핵심 대사를 먼저 써놓고 그 대사를 위해 다른 대사들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해보십시오. 인물이 그 핵심 대사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대사의 흐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하고 싶었던 핵심 대사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핵심 대사 자체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핵심 대사가 아무리 폼나는 명언이라 할지라도 전체 이야기 플롯을 망가뜨리거나 이야기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면 그 대사는 과감하게 버려야합니다.


참고로 워드나 한글 프로그램에서 씬이 자동으로 매겨지는 기능을 사용하여 향후 수정에서 씬을 삽입하거나 바꿀때 쓸데 없는 수고의 낭비를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 씬넘버 생성 기능을 직접 설정하기 어려울 때는 자동 넘버링이 되어 있는 기존의 대본을 카피하여 사용하십시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가졌다면 이제 여러분은 초고 작업을 할 기본적인 준비가 끝났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제가 작업했던 <착한 악마>의 씬 시놉시스를 문서로 출력해서 모니터 옆에 놓고 보면서 초고 작업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방식대로 작업하시기 바랍니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포스트잇에 씬을 하나하나 써서 벽에 붙였다가 이리저리 옮겨가며 궁리를 해보아도 좋고 엄청나게 큰 사이즈로 씬 시놉시스를 출력해서 벽에 붙여 놓고 작업해도 좋습니다. 준비되셨나요? 오케이. 그럼 저와 함께 초고 작업을 시작하시지요!     


“착한 악마”_초고대본_v.210325     


S1. 종합병원 응급실. 낮.     


종합병원 응급실 안.

응급 환자 여럿이 침상에 누워있고 바이탈 계기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온 몸에 기브스를 환자 하나가 의식을 잃고 잠들어 있고 그 응급의사 정원과 레지턴트, 인턴 두 명이 서 있다.      

정원              바이탈은 어때?

레지던트        (차트를 보며) 위급한 상황은 넘어간 거 같아요. 지금은 산소포화도만 조금

                    낮고요.

정원              다행이네.. 약은 뭐 줬어?

레지던트        안지오텐신요.

정원              얼마?

레지던트        10미리요.

정원              오케이.      

그 때, 정원의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정원              (핸드폰을 꺼내서 화면을 보고는) 안정되면 입원실로 올려 보내고. (복도로 걸어

                     가며 핸드폰을 귀에 댄다) 예, 아주머니.

아주머니         (F) 사장님, 내가 오늘 민호 못 델러가요.

정원               왜요? 저 오늘 저녁 약속 있다고 미리 말씀..

아주머니         (F) 우리 아저씨가 다쳤대요. 공사장에서 떨어졌대! 

정원               아이구.. 아저씨 많이 다치셨대요? 

아주머니         (F) 나 지금 정신 한나도 없어요. 나 지금 가야돼요.

정원               아주머니, 민호 학원이 몇 시에 끝나죠?...     


정원이 말하는 도중 전화가 뚝 끊겨버린다.

정원이 ‘하...’하며 고민스러운 신음을 내뱉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정원             (상대가 받자) 응, 석우야. 나 오늘 못 가겠다. 응, 그래. 미안하다 정말.      

 

S2. 응급실내 탈의실. 낮.


정원이 급한 걸음으로 탈의실로 들어온다.

자신의 라커를 열고 가운을 벗어서 걸고 외투로 갈아입는다.

빠른 동작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연신 손목시계를 들어서 본다.

라커문을 닫으려다가 라커에 달린 거울을 보고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는 가방을 들고 급히 나선다.     


S3. 응급실 복도 - 출입문. 낮.


잰걸음으로 응급실 복도를 걷는 정원.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간호사들이 인사를 하자 고개를 꾸벅하고 답례한다.

정원이 응급실 출입문을 나서려는 순간, 출입문이 활짝 열리고 응급대원들이 피투성이가 된 응급환자의 침상을 밀고 들어온다. 

그 환자 뒤로도 중상을 입은 다른 환자들이 줄줄이 실려 들어온다.      


응급대원          (정원을 알아보고 멈춰서) 차교수님! 

정원                무슨 일이에요?

응급대원          요기 옆 고등IC에서 10중 추돌 사고가 났어요!

정원                아..

응급대원          교수님, 이 환자 좀 봐주세요, 위급합니다!

정원                (난처하다) 아, 지금 제가 퇴근하는 길이라..

응급대원          CPR 계속 하면서 왔는데요, 심박이 안 돌아옵니다!

정원                (환자를 보자 눈빛이 바뀌며) 혈압은요?     


S3. 학원 앞 놀이터. 낮.     


민호(7)가 미끄럼틀을 타며 아이들과 놀고 있다.     

엄마1            철현아!

엄마2            재완아~     


엄마들이 민호와 함께 놀던 아이들을 부르고 아이들은 ‘엄마~’하며 달려간다.

홀로 남은 민호. 

민호는 핸드폰을 꺼내서 통화 목록에서 ‘아빠’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신호가 여러번 울리지만 받지 않는 정원.

핸드폰에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갑니다’하는 안내음이 들려오고.

시큰둥해진 민호가 다시 통화버튼을 누른다.        


S4. 응급실. 낮.     


핸드폰 진동 소리 이어지며

정원이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S3의 환자 위에 올라탄 채 CPR을 하고 있다.

정원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S5. 학원 앞 놀이터. 저녁.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민호가 공원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데 계속 음성사서함 안내만 들린다.     


민호              아, 아빠 뭐야~.     

짜증을 내던 민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S6. 응급실. 저녁.     


E.   펑!     

기계음과 함께 솟구쳐 오르는 환자의 몸.

정원이 심장 제세동을 하고 있다.

삐~ 소리를 내며 평행선을 그리는 바이탈 계기의 선은 변함이 없고.      


정원               200!

간호사            200!     


제세동기가 충전되는 소리가 위잉 들리고 간호사가 정원의 두 손에 들린 충격기에 젤을 붓는다.

충격기를 다시 환자의 몸에 대는 정원.     


간호사           환자한테서 떨어지세요!     


정원이 쇽 버튼을 누르자 또다시 펑!하고 솟구쳐 오르는 환자.

정원이 계기를 보지만 여전히 신호에는 변화가 없다.     


정원              360!     


가운도 입지 않은 채 피투성이가 된 정원의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제세동기 충전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고 정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연신 쳐다본다.     


S7. 공원 옆 인도. 저녁.     


민호            아! 진짜 나쁜 아빠야!     


민호가 혼잣말로 화를 내며 공원 옆 인도를 걸어가고 있다. 

그 때, 민호 앞에 새끼 길고양이가 달려간다.

순간 표정이 바뀐 민호가 ‘어? 냥이다!’하며 고양이를 따라 공원 숲 속으로 들어간다.

공원 안에서 고양이의 짧고 강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S8. 응급실. 저녁.     


정원               사망 선고해.     


정원이 곁에 서 있던 레지던트에게 지시한다.


환자의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슬피 울기 시작한다.     

레지던트  김석철 52세 남.. 2021년 4월 1일 7시 49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정원이 마른 세수를 하다가 시간을 듣고는 ‘아!’ 깜짝 놀라 뛰어나간다.     


간호사  어? 교수님!     


S9. 공원 숲 안. 밤.     


민호              야~오오옹, 야오오옹.     


민호가 자세를 낮춘 채 공원 숲 안에서 고양이 소리를 내며 새끼 길냥이를 찾다가 우뚝 서 있는 남자의 다리를 본다.     


민호             악! 깜짝이야.     


남자의 행색은 노숙인인 듯 남루하고 벙거지 모자를 썼다.

남자가 민호의 소리를 듣고 천천히 뒤로 돌아보는데 민호와 눈이 딱 마주친다. 

남자는 축 늘어진 고양이를 들고 목에서 피를 빨아먹고 있다.

민호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린다.     


S10. 응급실 탈의실. 밤.     


정원이 라커로 뛰어들어와서 라커 문을 연다.

연신 시계를 보며 옷을 갈아입고 라커 문을 잠그지도 않고 뛰어나간다.     


S11. 공원 옆 인도. 밤.     


민호가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비틀비틀 공원 옆 인도로 걸어나와서 픽 쓰러진다.

민호의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행인(여)              캬아아아악!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든다.

누군가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한다.

바닥에 쓰러진 채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가는 민호의 얼굴 위로 엠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S12. 정원 차 안. 밤.     


E.  뚜루루뚜뚜루뚜루~ (핑크퐁 아기상어 벨소리)     

정원              민호야... 전화 좀 받아라...     


민호의 컬러링이 차안에 계속 울리고 있다.

초조한 표정의 정원이 앞을 보면 차가 꽉 막혀 있다.

핸들을 이리 저리 틀며 빠져나가려하지만 꽉 막힌 도로에 갖혀 버린 정원의 차.      


INS.         공원 숲 어딘가에 떨어져 깜박거리고 있는 민호의 핸드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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