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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수고모 May 04. 2021

“아들이 입으라던 꽃무늬 이제야 입어봐요”

2018년 故 김성재 어머니 육미승 인터뷰


육미승 동년기자에 관한 기억 중 또렷한 두 가지가 있다. 개명을 한다기에 새 이름으로 동년기자단 명함을 제작해드렸다. 사정이 생겨 이름을 바꾸지 못했으니 원래 이름으로 명함을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알겠다고 했는데도 회사 직원에게, 임원에게 반복해서 부탁했다. 왜 저러실까. 다른 하나는 그녀가 쓴 기사 때문이다. 화재로 큰 화상을 입은 데 이어 상처한 둘째 아들 이야기였다. 처절하고 아픈 사연을 덤덤하게 써낸 어머니 심정은 어떨까. 그때 그 무렵. 그녀가 1990년대 패션 아이콘이자 한국 힙합의 포문을 열었던 故 김성재(1972∼1995)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 김성재 팬들이 마련한 생일축하 광고판 앞에 앉은 육미승 동년기자.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아들과 데이트하듯 시작한 인터뷰


여의도역 5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난 4월, 마흔여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큰아들 성재의 팬들이 여의도역에 지하철 광고를 냈다. 아들 얼굴이 오랜만에 사람 지나는 길에 걸렸으니 예쁘게 하고 나오시라 부탁했다.


“예쁘게? 성재가 말해준 스타일이 있어요. 아직 한 번도 못해봤어요. 나더러 짧은 청재킷에 귀여운 꽃무늬 롱스커트를 입고, 앞코가 뽈록 둥그스름한 구두를 신으라고 했어요. 자기 엄마가 꽃다운 아가씨인 줄 알았나봐요.”


소소하게나마 아들과 함께하는 데이트 기분을 내드리고 싶었다. 옷장을 뒤져 연분홍 꽃무늬 원피스에 청재킷, 검정색 워커를 찾아 쇼핑백에 담았다. 고속버스터미널 꽃 도매시장에 들러 안개꽃도 샀다. 아들 성재가 좋아했던 꽃이다. 준비해간 옷을 보여줬더니 “사람들이 이상한 할머니가 밖에 나왔다고 할 것 같다”면서 수줍게 웃는다. 그냥 “아드님 소원성취해주는 날로 생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들, 엄마 왔어.”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아들 김성재의 얼굴이 보인다. 웃는 얼굴을 사용하고 싶었는데 큰 사이즈로 쓸 만한 사진이 슬퍼 보이는 모습의 흑백사진이었다고 아쉬워한다. 그래도 아들이 원하던 모습을 하고, 안개꽃을 들고 있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 보인다. 올해는 대견스럽고 멋지던 큰아들 성재가 23년 생을 살고 죽은 지 딱 23년 된 해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는 팬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나는 성재 하나 보냈잖아요. 근데 나를 ‘엄마’, ‘어머니’ 하는 애들은 얼마나 많은지.”


별이 된 큰아들 김성재 이야기


김성재는 서울 상문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 이현도와 함께 1993년 힙합


2인조 듀스로 데뷔했다. 듀스는 당시 유래가 없었던 힙합을 한국 대중가요에 들여온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여성과 남성에게 고르게 인기를 얻었던 흔치 않은 그룹이었다. 2년 동안 정규앨범 4개를 발표하고 해체 뒤 김성재는 솔로 데뷔를 준비했다. 1995년 11월 19일 SBS 인기가요에서 성공적인 솔로 데뷔 무대를 마친 다음 날 새벽. 아들 김성재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지금도 궁금증을 풀지 못한 아들의 죽음. 전화로 “엄마 성공이래! 빨리 가서 엄마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라고 들뜬 목소리를 들려준 게 장남과 나눈 인생 마지막 대화였다.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생때같은 젊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육미승 씨.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릴 적 아들을 추억할 뿐이다.


치과대학 지망생, 전설이 돼다


“성재는 굉장히 달랐어요. 태어나면서부터 노래하고 춤췄거든. 옹알이를 할 때도 마이크라면서 뭘 들고 와서는 노래를 불렀어요. 일본에서 살 때 TV를 보다가 ‘야, 김성재 너 공부 때려 치고 가수로 좀 나가봐!’라고 했어요. 그때 성재는 치과대학에 가고 싶어서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외국 지사에서 주로 일하던 남편을 따라 가족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 1988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큰아들 성재의 꿈은 치과의사였다. 젊어서부터 틀니를 꼈던 아빠의 이를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어 하던 착한 아이였다. 그 꿈은 육미승 씨가 이혼을 선택한 이후 깨지기 시작했다. 장남으로서 부모 이혼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느낀 김성재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남편 같은 아들, 아버지 같은 형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막중하던 속 깊은 장남이었다.


“일본은 고등학생이 되면 정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라며 엽서가 집으로 배달돼요. 용돈을 받아쓴 적이 없던 애라서 한국에서도 용돈 벌고 싶은 생각이 있었겠죠. 그 와중에 현도를 따라서 최고의 춤꾼이 모인다던 ‘문라이트’에 갔대요. 성재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예요. 클론의 강원래는 아들 눈에 영웅처럼 보였다더라고요.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치대에 가겠다는 생각을 접었죠. 춤꾼으로 인정받았으니까요.”


김성재는 이곳에서 만든 인연과 노력으로 ‘현진영과 와와’ 백댄서로 방송계에 발을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진영이 1991년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와와팀’이 와해됐다. 이후 현진영 소속사였던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대표가 김성재를 영입하기 위한 물밑 작전을 폈다. 이현도 또한 김성재와의 데뷔를 꿈꾸며 다른 매니저와 함께 수도 없이 전화를 해왔다. 그 사이 대학에 갈 거라며 두 쪽 다 선택하지 않았고 한양대 관광학과에 시험을 봐 입학했다.


“저는 이수만 씨와 손을 잡았으면 했는데 성재는 우정을 택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치고 박던 개구쟁이 사이 같아도 음악만큼은 현도하고 성재가 잘 맞았던 거죠.”


싸우고 만나지 않다가 다시 만나 붙어 다니기를 반복했다. 아들이 일본에 있을 때 사다 모은 음반이 많아서인지 이현도가 자주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아들이 입어보라던 꽃무늬 원피스에 청재킷. 성재가 이 모습을 보면 좋아할까요?(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김성재·이현도, 서로를 대체할 수 없다


“지금은 현도가 음악을 못 만들잖아요. 속 터놓고 음악을 같이 다듬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겁나나봐. 발라드는 어느 정도 만드는데 듀스 색깔은 안 만들어. 스트레스가 많은 거 같아. 물론 그 속사정은 알 수가 없지만요.”


김성재가 죽고 가족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은 이현도일 것이다. 듀스 해체는 오래도록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김성재의 솔로 활동도 이현도와 미국에서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말하자면’ 노랫말은 김성재의 말투와 주로 하던 말들로 이현도가 작사했다. 듀스 초반 힙합으로 콘셉트를 잡아간 것도 일본에서 힙합을 접하고 왔던 김성재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 듀스의 색깔이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이현도도 김성재도 서로를 대체할 수 없어서다. 5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현도는 “나는 정말 사람 잘 만났다. 혼자 했으면 대중 앞에 소개되는 기회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며 김성재에 대한 고마움과 친구를 떠나보낸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운명을 이기고, 글을 쓰며 치유하다


최근에 와서야 본명이던 육영애(陸瑛愛)에서 육미승(陸美勝)으로 개명 신청을 마쳤다. 모교에 방문해서 이런저런 서류의 이름을 바꾸고 두 아들의 팬과 교류하는 SNS 계정 이름도 바꾸고 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엄청 지독한 삼재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름을 빨리 바꾸라고 누군가가 말해줬다.


“작년에 며느리 상을 당한 이후 정신없이 살았는데 개명 신청이 기각됐더라고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리고 얼마나 더 큰 시련이 있어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일본에 살 때 길 가던 사람이 너무 그렇게 정직하게 살지 말라고 조언했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하라고 했다. 아들이 죽던 날도, 둘째 아들이 화상을 입던 날도 후회스런 날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눈이 다쳐 병원에 안 가고 있다가 시기를 놓쳐 실명할 뻔한 일도 있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탁 떠오르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하라고 했는데 이제부터는 안 그래야지 하는데도 그 순간이 되면 못해요.”


그래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해방구다. 현재 모교 문인회에서 이사를 맡고 있고 다양한 시니어 관련 일에 참여 한다. 그중에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 활동도 있다.


“자식 얘기이건 뭐건 쓰고 나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치유가 됩니다. 중간중간 치료받는 거예요. 너무 깊이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잖아요. 그리고 둘째 성욱이가 있잖아요. 성재는 어쩔 수 없고 제 옆에 남아 있는 아들한테 신경을 써야죠. 얘가 똑바로 가야 내 생활도 똑바로 가는 거고요.”



▲아들 김성재와 함께 왔었던 여의도 MBC 공개홀 앞.(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단 30분만이라도 말해보고 싶습니다


길을 걷다 여의도 MBC 앞에 섰다. 지금은 상암동으로 사옥을 이전해 예전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지만 아들과 추억만큼은 남아 있다. 예전 MBC 공개홀 앞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성재는 저에게 이런저런 작은 얘기를 해주는 것을 좋아했어요. 방송국에도 자주 왔었어요. 이곳저곳 다니면서 설명해주고 방송국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라고 인사도 많이 시켰어요. 그리고 MBC라디오 김승현, 손숙 씨가 진행하던 여성시대에 성재랑 출연도 했었어요. 성재가 간 해 5월 8일 어버이날에요. 그게 영원히 마지막이었던 거지.”


아들이 죽고 다음 해 어버이날, 운전하고 가다가 여성시대를 듣게 됐다. 사연을 신청하라기에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눈물범벅이 돼 전화할 수 없었다. 차를 세우고 한참 있어도 수화기를 들 수 없었다. 그렇게 방송이 끝났다.


“해야 하는데 작년 이 시간에 내가 아들이랑 나왔었는데. 말을 해야 하는데 눈물이 나서 전화를 못했어요.”


김성재라는 아이콘은 현재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최근 JTBC ‘슈가맨’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솔로곡 ‘말하자면’이 전파를 탔다. 배우이자 가수로도 활동했던 동생 김성욱 씨가 형을 대신해 무대에 섰다. 그리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김성재 사망사건 재수사를 요구하는 청원 글이 1만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진짜로 내가 바라는 것은 단 30분이라도 그 여자아이와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순식간에 다 바뀔 거야.”

여의도역에 있었던 김성재 팬들의 생일 축하 메세지.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아들을 죽인 유력한 용의자였던 전 여자친구 A 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1심에서 사형이 구형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심과 3심 대법원최종판결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서울의 한 치과대학 출신이던 A 씨 실명은 인터넷 검색창에 ‘김성재’를 치면 연관검색어로 등장한다. 유력한 대권주자가 가까운 친척이라고 육미승 씨에게 실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오른손잡이인 아들을 왼손잡이라고 경찰에 얘기했다. 부검을 하지 못하게 검사에게 돈을 주라고도 했다. CCTV는 사라졌고 중요한 증인들이 출국을 하거나 죽었다고도 했다. 집 앞에서 “가수인 너 따위가 뭐라고 내 마음대로 안 되냐!”며 소리 지르기도 했다. 아들이 죽고 가졌던 진혼제에서 김성재의 영혼이 “전 여자 친구가 동물 마취제로 죽였다”고 주장했다.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이어서 똑똑히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은 마약한 사람 혹은 자살한 사람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언론중재위원회에 가서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바로잡고 용서를 받는 거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말이 많이 잦아들었어요. 정말 만나서 묻고 싶습니다. 그날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요.”


이번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김성재가 나온 옛 영상을 찾아봤다. 보면 볼수록 저 아까운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전설로 남는 것보다 평범하게 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듀스 고별 콘서트 무대에 아들과 같이 올라 환하게 웃던 젊은 육미승 동년기자가 떠올랐다. 동년기자 활동을 통해 글을 쓰며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치유받는 삶을 살기 바란다. 웃음도 찾고 말이다.



▲‘말하자면’ 데뷔 무대를 마친 뒤 환한 모습의 큰아들 김성재. (육미승 동년기자 제공)
▲서울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 김성재 팬들이 마련한 생일축하 광고판.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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