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실 Mar 14. 2024

결혼 얘기 나올 때까지 옷 한 벌 못 사줬네

 주로 직장 동료와 가족에게 스트레스받았다. 회사에서는 납득되지 않는 일이 수두룩했으며 집에서는 내게 상처주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트레스를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 보니 스트레스의 반이 줄었다. 심지어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커졌다.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빠 지갑 낡았던데, 이거 사다 줄까?"


 안정적인 삶에 만족하고 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엄마는 친구의 딸 남자친구, 남편 얘기를 자주 꺼냈다. 내 연애사를 궁금해하는 게 보였다. 나는 엄마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에 남자친구 존재를 밝혔다. 엄마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남자친구가 네가 좋대? 너는 얼마나 좋은데? 일단 서로 사랑해야 해." 엄마는 외모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언제 결혼하냐"는 말을 달고 살았던 엄마였는데, 조금 낯설았다. 엄마도 나랑 떨어져 지내면서 내가 애틋해진 걸까? 지금의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혼은 안 해도 돼."


 난 결혼 생각은 있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없다.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결혼과 어울리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달까. 결혼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거야?" 친구마다 답변이 달랐다. '다시 좋아하고 싸우고를 반복하는 게 귀찮아', '없으면 허전할 거 같아서?', '내가 뭔가 하자고 할 때마다 군말 없이 해준 사람이라서',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오갔고 정말 자연스럽게 결혼식까지 왔어.'


 답변 중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없었다. 현실 속 결혼은 드라마랑 다른 게 분명하다.


 지금의 남자친구가 좋다. 다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감정보단 이렇게 날 좋아해 줄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뭘 하든 좋다고 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나 덕분에 성장한 것 같다는 말도 쑥스러워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먼저였다. 내 마음도 지금 남자친구를 확신하지 않는 걸까?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다시 돌아와, 엄마는 내게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물었다.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엄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엄마가 화를 냈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남자친구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편견 속에 갇힌 남자친구를 보는 게 서운했다.


"잠깐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지 완전히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후 세계가 꼭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나중에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남자친구가 내게 담담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눌 때 친척들의 시선도 알 수 있었다. 친척들은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와 남자친구 동생을 안쓰럽게 봤다. 남자친구는 그냥 하늘이 빨리 부모님을 필요로 한 것뿐인데 주변에 안타까운 시선으로 본 게 싫었다고 했다. 그런 남자친구의 말투는 화나기보다 이해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건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 (물어봐서) 미안하다, 괜찮냐 등의 반응을 보이곤 한다. 다들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거겠지.


 엄마와 대화를 하고 나니 너무 우울했다. 집에서 나왔다. 울적하다는 나의 말에 남자친구는 바로 달려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숨만 나왔는데 남자친구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편이 아니라 하품하며 피곤하다고 말했고 티 안 나게 눈물을 닦아냈다.


 작년에 남자친구랑 다낭 여행을 다녀왔다. 남자친구는 여권을 찾기 위해 서랍을 열었고 서랍 끝에 걸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여권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어머니랑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아들은 사랑'이라고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동생 손글씨로 '엄마도 사랑'이라고 적은 글을 봤다. 성인이 되고 잘 울지 않았지만 이 날만큼은 울컥했다고도 말해줬다. 이걸 듣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을 잘 받아서 사랑을 주는 방법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이 나로 인해 상처받는 게 싫었다.


 드라이브하고 길거리 음식을 먹는 이 소소한 시간마저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엄마와의 대화를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남자친구의 해맑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고 나에게 달려와주고 내 기분을 풀어주겠다는 사람인데. 나는 도저히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엄마한테 얘기 들었다며 아빠한테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얘기에 알겠다고 했지만, 아빠도 내게 한마디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왼쪽 배가 쿡쿡 쑤셨다. 상상 속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엄마 아빠의 짜증 섞인 표정을 만들어냈다.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바쁘더라도 잠깐 왔다 가라고 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지금 부딪히는 게 나을 거 같아 심호흡하며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 생각과 다르게 아빠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보듯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음식을 주문한 뒤 내게 말했다. "어떤 사람인데?" "뭐 하는 사람인데?" 등등 아빠라서 할 수 있는 질문을 이어갔다. 사진을 보여주자 "나쁜 사람 같지는 않네?"라고 말했다. 남자친구 집안을 나쁘게 볼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과 달라서 당황했다. "남자가 잘해준다는 거 하나만 보고 결혼한다고 할까 봐 걱정됐어. 상대가 온다는 건 상대의 경제력도 오는 거야.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면 동생과의 관계는 어떤지, 친척과의 관계는 어떤지 조금씩 물어봤으면 좋겠어." 그렇게 식사가 끝날 때쯤 아빠가 말했다.


옷 한 벌 사줄게
결혼 얘기가 오가도록
옷 한 벌 제대로 사준 적이 없네


 순간 너무 울컥했다. 나는 나인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조금 낯간지러웠다. 아빠한테 장난치며 비싼 거 사게 빨리 가자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상 옷 가게에 갔을 때 옷보다 가격을 살펴보며 옷을 구경했다. 아빠가 돈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에 쉽사리 이 옷이 좋다는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가족은 참 힘든 관계인 것 같다. 서로를 이렇게나 생각하는데도 너무 쉽게 상처 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니 말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 모두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를 선택하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