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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싫은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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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Dec 26. 2019

외국 여행

좋았던 혹은 나빴던



몇 번의 외국 여행을 같이 다녔다. 그는 걷는 걸 싫어했으므로 휴양지 위주의 여행이었던 것 같다 ㅡ 어쨌든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아메리칸” 같은 구석이 있었고 같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갔다 온 기억에 대해서는 별로 즐기지 못했던 여행이라고, 힘들었고 지루했다고, 아무렇지 않고 또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루함의 여왕이며 나태의 마왕인 내가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는 일 년 중 지루한 날이 삼백 오십 오 일이라면 그나마 하루는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구실이 생겨서이지, 남들에게 내 생일을 광고하고 선물을 주고받기 위함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가 크리스마스와 주말과 어린이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런 날을 어중이떠중이로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삼백 오십 오 일 중 지루한 날들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유치하지 않고 쿨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 처럼 보였던 그는 늘 그런 식으로 과하게 솔직했으며, 나에게 여러 방식으로 상처를 주었다.


생일 그게 뭐라고? 크리스마스 그게 뭐라고? 또 이번 주말에는 그게 뭐라고? 그래봤자 그냥 노는 날 중 하나인데.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생일 축하를 받기 위해 경기도, 강원도, 또 어디의 펜션으로 놀러갔고 자기 집에서 술 파티를 벌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주말에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니까 더 피곤하다며, 이런 식으로 별 것 없이 지나가는 주말이 싫다며, 그런 주말에 함께 있는 내가 지겹다며, 내가 가족 같아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며, 지루함을 피력하였다. 그 지루함은 진즉에 해소되어야 할 것이었고, 그가 스스로 움직임으로서 없애야 할 종류의 것이지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종류의 지겨움이 아니었을 텐데. 아니면 그는 아무리 만나도 지겹지 않은 사람, 그래서 그가 상처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 그는 아직 수만 번의 연애를 했을 뿐 인생 한 번의 사랑은 하지 않은 행운아일까, 아니면 그냥 쿨해 보이고 싶어하지만 결국은 “과도한 솔직함”이라는 유아성을 벗어나지 못한 철없는 남자일까?


덕분에 나에게는 그와의 휴양지 여행에서도 유럽 여행에서도 모두,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첫 번째로 같이 갔던 휴양지에서 그는 나를 당황시켰다. 넌 나를 왜 만나니, 라는 주정을 피우면서 나를 고뇌하게 만들어놓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전형적으로 “만난 지 삼 개월 후” 차갑게 빠르게 매정하게 냉정하게 식어버린 한 아저씨가 되어 나를 더 어이없게 만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잘 할 수는 없잖아, 이제 허니문 기간은 끝난 거 아니야? 그에게는 재미있는 농담이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그 표정과 말투가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코타키나발루에 대한 기억이 별로 재미없었던 것 같다. 거기 리조트 별로였다, 야시장을 못 가서 지루했다, 다른 동남아 여행, 이를 테면 다른 여자친구와 같던 피피섬 여행 같은 태국 여행이 더 재미있었다, 라고 몇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역시나 그가 가진 솔직함의 발로였다. 실상 나는 그가 대학생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들, 동영상들도 관람하게 되곤 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까지 다녀왔던 여행도 그에게는 역시나 별로였던 것 같다. 체력적으로 힘들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괴롭고 매일 보는 성당들도 별 것 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빠에야도 하몽도 모두 몇 번 먹더니 질리더라, 라고 해서 일식을 참 많이 먹었다. 겨울 여행이라 나도 지쳤고, 내가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부담을 엄청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야? 여긴 뭔데? 뭐가 좋다는 건데? 솔직히 나 역시 그런 역할을 맡아본 적이 없어서 정말 힘들었다. 왜 내가 전부 다 알아서 해야 해, 같이 나누어서 할 수도 있잖아. 리스본에서 내가 울먹거리자 그는 입을 꾹 닫았고, 그 이후로 하루종일 서로 한 마디도 안 하고 산 정상의 요새에까지 올라갔다.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의 대화를 다시 재개했다. 그라나다에서는 내 실수로 입장권 예매를 놓쳐 궁전을 다 구경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세비야에서부터 차량을 빌려 이동했기 때문에 적어도 거기서부터 그의 기억은 이전보다는 나아졌을 거라고, 재미있게 기억하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는데, 여행을 다녀온 이후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다. 아무튼, 고생스러웠던 모양이다. 리스본의 번쩍번쩍한 버스 터미널, 포르토의 와이너리들, 말레가의 겨울 같은 것이 나에게는 그래도 삼백 육십 오 일 중 지미있고 소중했던 며칠로 남아 있는데, 그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았던 기억이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정말 힘들고 지루했던 기억뿐일까? 어쩌면 그가 그런 면에서는 솔직함을 드러내지 않아서, 나는 그가 여행 내내 느꼈던 불만과 고충만 알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쑥스러운 말을 아끼고 할 수 있는 말만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그를 이해해야지, 라고 여겼던 시절의 자위이지, 대개 그에게 대해 맞아떨어지기 마련이었던 내 최악의 상상들에 부합하는 생각은 아니다.


세부로 여행을 간 것도 결국 다른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으니 그가 별로 재미있었을 리는 없다. 태국이나 베트남은 너무 많이 갔고, 유럽은 고생스러워 가기 싫고, 좀 멀리 가 보고 싶은데 비행기를 타기가 싫고, 휴양지로는 가야겠고, 그러다 그러다 남는 곳이 세부였던 것 같다. 숙소는 두 번 옮겼고, 나름대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마지막 숙소에서는 저녁에도 싸우고 아침에도 싸웠다. 나는 저녁에도 울었고 아침에도 울었다. 별 일 아닌 일에 언짢은 소리를 듣는 게 화가 나서 울었다. 날씨가 더운데 왜 쓸데없이 고집을 피워서 당구를 치려고 하느냐, 너 덕분에 술을 전혀 마시고 싶지 않으니 그냥 얼른 잠이나 자자, 라는 말에 화가 나서 울었다. 아침부터 왜 핸드폰을 하느냐,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스파를 예약해도 되지 않느냐, 내가 식사하면서 언제 핸드폰을 했다고 그러냐, “그런 식으로 표정 짓지 마, 짜증나니까.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싫으면 너도 그럼 이런 식으로 말해”, 라는 말에 화가 나서 울었다.



외국의 바다를 보고 있으니, 아니, 다른 커플 여행객들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미련한 일이다. 다들 참 둘둘이 사이좋게도 다닌다. 그와 내가 갔던 여행에서 나라도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위안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기억들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처럼 바이바이 해야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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