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용선 Feb 15. 2022

믿음, 은총, 바이블 그리고 구원

- 무엇으로부터 구원인가?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꾀던 독사처럼 혀를 낼름거리며, 근본주의자들이 즐겨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무엇으로 구원받지요?"

이 단순한 질문은 하나의 답을 요구하기에 앞서 준비하는 교묘한 덫이며, 그들이 준비한 대답은 묻는 자의 목적에 따라 "오직 믿음!" 또는 "오직 은총!" 또는 "오직 바이블!" 중 한 가지만을 정답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구원의 전제조건으로서 믿음과 은총과 바이블 세 가지 모두에 '오직'을 붙였습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인간은 오직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다."

"인간은 오직 바이블로 구원을 얻는다." 

한 가지에만 붙을 수 있는 '오직'이라는 부사를 마르틴 루터는 어째서 세 가지 모두에 붙였을까요? 이는 '구원'이란 말의 특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원에는 반드시 '무엇으로부터' 또는 '어느 곳으로부터'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대충 뭉뚱그려 설명해도 좋을 관념적 현상이 아니라 엄연히 대상이 있는 생생한 실체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불의로부터' 구원합니다.


이신칭의(以信). 인간은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여기에서 믿음이란 단순히 기독교라는 문화의 일원이 되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되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이자 태도'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를 불의로부터 구원할 것입니다.


은총은 우리를 '단절'로부터 구원합니다. 


인간은 불을 비롯한 문명을 만듦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세속의 불평등과 위험 속에서 살아가다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보다 자신들이 별반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까지 염려하고 집착하여 무덤을 비롯한 장례풍습을 만들었지만, 그 모두는 정작 죽어 잊혀지는 당사자에겐 아무런 득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 가여운 인간에게 하느님은 은총을 베풀어 단절을 회복시키십니다.


바이블은 우리를 '어두움'으로부터 구원합니다.


바이블은 고대문서인 데다가 여러 사람이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입장과 형태로 쓰고 편집한 책입니다. 당대는 물론 그보다 먼저 등장한 책들과 비교해도 세련미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이 허술한  책은 시종일관 신비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바이블은 등불 같은 책입니다. 그 등불은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의 성품을 지녔으며 인간과 하느님을 연결시키기에 적합한 존재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니 바이블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의 어두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어두움에 기독교라서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바이블의 설화 속 카인은 형제를 죽인 살인자의 길을 갔지만, 바이블의 역사 속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무리는 살육하여 땅을 확보했지만, 같은 이름의 예수(=여호수아)와 그의 무리는 희생과 사랑으로 땅을 거룩하게 바꿔갑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피에 젖게 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리가, 하느님의 아들들은 더더욱 아닙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