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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 Jun 03. 2019

100년 전 책에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보다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솔직히 말하자면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크게 흥미롭다고 느껴지는 스토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책을 계속 읽어갔다. 마음이 무거워 지거나 생각이 과도하게 많아질 때면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가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라며 투덜거리다가도 어느덧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학교와 아버지, 몇몇 교사들은 속된 명예욕이 가녀리고 어린 생명을 참혹하게 짓밟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왜 매일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고, 라틴어 학교 친구들과 이렇게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인가? 왜 낚시를 하거나 시내를 산책하지 못하게 하는가? 왜 심신을 고단하게 할 뿐인 별 중요하지도 않은 명예심을 자극해서 부질없는 속된 이상에 매달리게 하는가? 시험이 끝난 뒤에도 왜 쉬지 못하게 하는가? 지칠 대로 지쳐 길바닥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헤르만 헤세가 <수레바퀴 아래서>를 발표한지도 어언 100년 하고도 3년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는 나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많은 청소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잠깐 고생하면 나중에 성공할 거란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 끄고 공부나 하렴.", "네가 지금 열심히 하면 좋은 친구들과 좋은 인생은 알아서 따라올 거란다.", "지금 잠시 방황하면 평생 고생을 하게 된단다." 등 나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의 만족과 명예를 위해서 말하는 '어른'들을 수없이 봐왔다.


'막연한 성공'. 안정적인 직업. 명문 대학교. 모두 속된 이상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평범하고 세속적'인 이상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더욱 갈망하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다 깨닫게 된다. 실체가 없고 타인이 주입한 이상만 바라보며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하지만 때는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에는 우리의 사고가 이미 닫혀 있고 우리 자신이 너무 무기력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적어도 세상이 보기에는.


(중략) 그 모든 추억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나이에 비해 성숙한 한스는 병든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꿈속 같은 제2의 유년기를 체험했다. 지나간 유년 시절에 대한 미련이 남은 그의 동심은 강렬하게 솟구치는 그리움을 안고 꿈처럼 아름다운 시절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법에 걸린 듯 추억의 숲을 헤맸다. 병적이리만큼 강하고 또렷하게 떠오르는 추억이었다. 그것을 직접 경험했던 지난날 못지않은 애정과 열정으로 한스는 그 모든 추억에 잠겼다. 기만으로 가득 차고 강박에 사로잡혔던 어린 시절이 봇물 터지듯 마음속에 솟구쳤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에서 다시 새싹이 돋아난다. 한창 젊은 시기에 상처 입고 병든 영혼도 꿈 많은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거기서 새 희망을 찾아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 이으려는 듯이.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은 나날이 쑥쑥 자라난다. 그러나 생명을 품고 있을 뿐, 결코 나무가 될 수는 없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랬다. 그래서 어린 시절 그가 꿈꿨던 길을 한번 더듬어 가볼 필요가 있다.


어릴 때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경험들이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더 이상 그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통감할 때 우리는 그 추억을 찾아 나선다. 때때로 추억은 강렬한 촉감으로, 냄새로, 소리로, 풍경으로 찾아온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고, 나로서 살게 된다. 그 과정을 거치며 누군가는 '새싹'으로 남아있지만 누군가는 다시 '나무'가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교사는 자기 반에 천재 한 명보다 멍청이 여러 명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교사의 임무는 뛰어난 정신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사람을 키우는 것이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것은 어느 쪽일까? 교사가 학생 때문에, 아니면 학생이 교사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상대를 억압하고 괴롭히는가. 누가 더 상대의 삶과 영혼을 더럽히고 상처를 입히는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분노와 치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진정한 천재들이 상처를 극복하고, 교사들에게 보란 듯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더구나 훗날 죽고 나서도 저 멀리서 비치는 환희의 후광에 둘러싸여 후세대 학생들에게 걸작품이나 고귀한 모범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이렇듯 학교에는 규칙과 정신의 싸움이 되풀이되고 있다.


학창 시절을 보내며, 지금의 일을 하면서 수많은 교사들을 만났다. 그중에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손에 꼽혔다. 오락가락하는 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 교사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실하고 (순종을 잘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학생을 만들 수 있을까, 에 있는 것 같다. (극단적일 수도 있는)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학교의 부조리한 규칙에 대해 학생 A가 이의를 제기한다. 그 학생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예의 바르지 못한 놈'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린다. 학생 A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결정은 학생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도 못한 채로.

학교의 주인은 교사가 아니다. 혹자는 학생들은 아직 어리므로 교사가 올바르게 인도하여 한 사회의 올바른 구성원이 되도록 이끌어줘야 한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학교에서의 사회화 과정이 필수라는 주장이다. 이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과, 학교의 규칙과 교사의 의견을 무분별하게 따르는 것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교사들을 나는 아직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그 외 성인 구성원들은 이들을 여러 가능성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강제로 떠미는 것이 아니라. 학생 수가 많은 만큼 개개인의 성향과 특성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획일적인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능력,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잠재력을 계발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 아닐까? 그럴 때야 비로소 헤르만 헤세가 말한 '규칙과 정신의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한스는 기분 좋게 목사관을 나와 낙엽송이 늘어선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사소한 불만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목사의 제안을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다른 친구들보다 앞서 가려면 야심과 인내심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대문이다. 한스는 꼭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왜'라는 질문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것 같다. '왜'라는 목적의식 없이는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으로 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부르제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목적이 없는 삶은 길 잃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왜 일을 하는지, 왜 공부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선생의 의무이자 국가가 부여한 임무는 어린 소년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본능적인 정력과 욕망을 누그러뜨려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절제되고 평온한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지금은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시민이나 성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도 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무분별하게 날뛰는 개혁가 아니면 헛된 상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한 사회에는 개혁가와 몽상가뿐만 아니라 체제에 잘 순응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혁가와 몽상가로 가득한 사회는 불안정하고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는 체제에 잘 순응하는 사람이 과도하게 많다는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회는 역동성을 찾아볼 수 없다.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보여도 생기가 없다.

모두가 태어날 때는 거친 자연, 날 것 상태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개혁가로, 몽상가로. 하지만 우리의 획일화된 교육이 이 날 것을 과도하게 가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성적이 계속 떨어지던 주인공 한스에게 신학교 교장이 한 말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한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치면 잠시 쉬어가도 돼. 그렇다고 수레바퀴 밑에 깔리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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