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 하완
그렇다. 인생의 대부분은 시시하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삶이란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런 시시한 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는 데 있지 않을까?
일상은 대체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볼일 있는 것으로 대할 때까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두 팔 벌려 햇빛을 쬐는 일,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가만히 멍 때리는 일,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바라보는 일,
내 앞에 놓인 음식의 질감과 맛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
지름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보는 일 등 시시해 보이지만 삶의 기쁨을 주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다.
약간의 여유를 갖고 주변을 바라보면 일상이 달라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안다는 건 더 많은 이해를 갖게 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의 생으론 이야기가 많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해도 부족하다. 삶이, 세상이, 타인이 이해가 되지 않아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난 이 발명이 참 좋다.
소설과 영화를 참 좋아한다. 그 안의 서사에서 많은 것을 간접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이야기는 해가 지날수록 완고해지는 고집과 자기 주관을 견제하는 유일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평소에 관심 없는, 기존 미디어에서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찾아 듣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겠다. 자기 주관에만 매몰된 우매한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돈을 벌어야 한다. 결국은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전과 큰 차이가 생겼다. 전에는 미래를 위해 인내하며 돈을 벌었다. 내게 돈을 번다는 건, 곧 무언가를 참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의 자유로움과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번다. 참는 것이 아닌 기쁨을 좀 더 맛보기 위한 능동적인 행동이다. 많이 벌 필요도 없다. 지금의 생활을 유지할 정도만 벌면 된다. 검소하게 살면 더 게으르게 살 수 있다.
필자의 말을 빌리자면, 내게 돈을 번다는 건, 곧 마음으로 믿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부수적 결과였다.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저축도 제대로 못하고, 약간의 불편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에 만족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에만 돈을 쓰기 때문이다. 매달 얼마를 버는 것이 아니라 매달 어디에 돈을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들과 꼭 속도를 맞춰 살아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이 살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왜 똑같이 맞추려고 애를 쓰고, 뒤처지면 불안해하는 걸까? 그리고 설령 뒤처지고, 느리다고 한들 그게 큰일일까? 사람은 각자의 속도가 있다.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남들과 맞추려다 보면 괴로워진다. 남들과 다르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전혀 다른 삶이 된다. 개성이다. 오우, 유니크!
23살에 대학에 다시 들어갔다. 주위 친구들이 전역할 때 즈음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30살에 현역으로 군 복무를 했다. 커리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그 시기에.
전역을 한 32살, 일종의 경력단절 남성으로 다시 사회에 복귀했다. 남들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살아왔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느린 속도 때문에 피해를 봤냐고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느린 속도가 오히려 다각도로 나 자신과 내 삶의 방향성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를 타인과 구분하는 '나만의'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회에서 기준으로 정하는 것에서 속도가 느릴 뿐 다른 기준을 두고 인생을 보면 전혀 느린 속도가 아니었다. 사회에서 원하는 속도, 내 인생의 행복을 결정짓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번아웃 상태까진 아닐지라도 우리 대부분은 에너지가 간당간당하다. 가끔 휴식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지만 터무니없이 짧다. 당연히 귀한 휴식이니 함부로 쓸 수가 있나. 제대로 된 계획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또 애쓴다. 쉬는 동안에도 온전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전투적으로' 여행을 하던 때가 있었다. 최대한의 가성비를 뽑기 위해 여행 전부터 여행 중에도 '완벽한 계획'을 짜는데 집중했다. 본 것도 많고 먹은 것도 많았지만, 몸과 마음은 항상 분주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녹초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어느 순간 그런 나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와버렸다.
이제는 '완벽한 여행 계획'을 짜는데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다. 교통편과 숙소를 제외하고는 여행 계획 짜는 일은 이동 중에 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보는 것, 먹는 것의 절대적인 양은 줄어들었지만 여행 중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더욱 오래 기억 속에 머무는 경험을 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건 덤이다.
뭐든지 힘이 들어가서 잘 되는 걸 못 봤다. 그림도, 노래도, 운동도 어쩌면 인생도 그럴지 모르겠다. 너무 힘이 들어간 탓에 내 인생도 이렇게 삐뚤삐뚤해진 게 아닐까? 힘이 들어가니 힘이 드는 게 아닐까?
인생을 막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 앞에선 누구나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잘 살고 싶어서 필사적이다.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꽉 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주고 버티느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힘을 너무 많이 주면 지치게 되는 것 같다. 일을 하면 할수록, 사람과 관계를 맺을수록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의욕에 넘치고 무언가를 너무 원해서 내 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달리기가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된다. 이때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면 모든 게 다 힘들게 느껴지고 이내 탈진하게 된다.
타이밍을 놓치면 작은 손해에서 그칠 일이 큰 손해로 이어진다. 무작정 버티고 노력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겐 노력보다 용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말이다.
나이가 먹으면서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포기한다는 것은 내면의 두려움을 마주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면의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것, 그리고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열정도 닳는다. 함부로 쓰다 보면 정말 써야 할 때 쓰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는 열정을 쏟을 일이 찾아올 테고 그때를 위해서 열정을 아껴야 한다. 그러니까 억지로 열정을 가지려 애쓰지 말자.
다른 맥락에서, 커리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 당시에 느끼는 나의 열정이 진짜 열정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열정의 '진정한 열정'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열정이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아차릴 감각과 용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 같다. 잠시 지나가는 열정이 진짜라고 착각한 나머지 너무 많은 힘을 쏟으면 나중에 진짜 열정이 와도 쓸 힘이 없게 된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반드시 '이만큼'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괴로움의 시작이다. 보상은 언제나 노력한 양과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것보다 작게 혹은 더 크게 주어진다. 어쩌면 아예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를 얻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비난하지 말고 그 성과를 인정해주자. 그것은 나 역시 노력에 비해 큰 성과를 얻을 수도, 노력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질투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런 행운을 인정하면 더 많은 행운이 찾아온다나 어쩐다나. 믿거나 말거나.
살다 보면 별로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인정을 받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을 보면 화도 나고 하루 종일 밥맛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러한 사람의 성공에 배 아파하면 나 자신만을 해칠 뿐이다. 관심을 끊거나, 그냥 인정하던지 둘 중 하나다. 세상사에서 인풋은 언제나 아웃풋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가 나를 볼 때는 내가 그런 부류일 수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아무리 노력한다고 생각해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한결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