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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pr 13. 2023

당근 하러 나갔다가...(5)

이야기의 시작



"여보세요? 저 ,,,,,거,,,, 동생이라는 분께서 지금 찾아오셨는데 통화를 좀 해보시겠어요?"


아저씨가 건네주신 수화기를 건네받았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굵직하게 들려왔다.



"형부? 집에 계셨어요?"

이건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형부는 이날 집에 없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강도 1~2 정도의 민폐만 끼칠 생각이었는데 형부라면 민폐의 강도가 급격히 올라가니 이건 얘기가 달랐다.


"형부! 밤늦게 죄송해요. 계신 줄 몰랐어요. 저 지금 아파트 입구에 와 있는데 출입구 문 좀 열어주세요!"


나는 전화를 관리실 아저씨께 넘겨주고서 급하게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호로록 아파트 내부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관문 너머의 두 부부의 얼굴을 상상하며 19층 버튼을 눌렀다.


'하느님 부디 두 부부에게 자비의 얼굴을 부탁드립니다.'




문이 열리고 언니가 나를 반겼다. 자다가 일어나 눈이 부신 얼굴이었지만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곧 형부의 얼굴도 보였고 나는 멋쩍게 인사드렸다. 아이들은 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터여서 나는 곧장 소파로가 털썩 주저앉았다.



"언니.... 나 불광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어"


시계를 보니 2시 반정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중간에 뛰기도 한 탓에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을 단축시켰다. 뿌듯했고 속으로는 나중에 더 단축시킬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쑥 하고 올라왔다.



"미친...........

................ 배고프지???"


언니의 첫인사는 짧고 간결했다. 다행히 웃음기가 어려있는 놀란 얼굴을 하고서는 제일 먼저 먹을 것을 챙겨주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자 언니는 곧바로 소파로 와 내 옆에 앉았다. 오늘 밤의 이야기가 다소 궁금해 보이는 눈치였다. 언니는 초저녁부터 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말똥말똥해져 있었다. 경청의 자세가 이미 준비완료된 얼굴이었다. 형부도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형부의 얼굴에도 짜증보다는 궁금증이 더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전 나는 먼저 언니에게 요청할것이 있었다. 집에 있는 마사지기를 총 동원해 달라고 했다. 내일 스케줄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일단 내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여기저기에 마사지기를 붙이고 하나는 어깨에 둘러메고 다른 하는 현재 가장 쑤시고 아픈 다리를 두두두두두 마사지해 가며 나는 입을 떼었다.




"언니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저녁 8시에 당근을 하러 나갔거든......"




이 이야기의 시작은 당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당근을 빼고서는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날 오후에 '띵동'하고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이야기. 나는 꽤 오랜시간을 무언가를 하기에 주저하며 살았다. 그래서 이날 밤 일어났던 사소한 하나하나의 일들이 신비롭기까지 느껴졌다. 단지 당근하러 나갔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파주 목동동까지 와있던 내게는 아주 큰 모험이었던 이야기.


나는 걸을 수 있구나. 한발 한발 목표에 도달하며 어디든지 갈 수 있구나

그리고 내가 싫어하던것이 그렇게 매력적인 순간일 수도 있구나

가로등이라는 탯줄로 곧게 이어진 소중한 인연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깊고도 힘찼던 밤.


그날밤의  긴 산책의 여운을 이곳에 적어본다.








(((번외 이야기)))


다음날 언니가 말해주길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 구세주다...!!!' 언니는 몇번이고 이 얘기를 계속하였다.


현관문을 들어서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이였을까 궁금했었는데 다행이었다. 내가 도착했던 날 언니는 집에 지인초대 약속이 있었고 그 제반준비를 버겁게 느끼던 차에 내가 갑작스럽게 등장하자 오히려 반가웠다고 한다. 그날 어둑했던 도로변을 힘차게도 저벅저벅 걷던 이는 꿀잠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아닌 구세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형부는 원래 조용조용한 성품을 지니셔서 크게 이렇다 저렇다 말은 안했지만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 주었고 가끔 '대단한데'라는 감탄사를 남겨주었다.  




나는 그날 밤 총 26km를 걸었다. 콤파스를 가지고 지도에 원을 그려보면 26km는 대부분의 서울지역을 덮는다. 그래서 나의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서울서울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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