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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Nov 18. 2022

홈스쿨링 엄마의 시간

 오후 2시 10분, 딸아이가 피아노 학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시간. 문 앞에서 아이를 배웅하고는 빠른 속도로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머그컵에 붓고 전자레인지에 넣은 후 1분 30초 버튼을 누른다. 그 사이 스타벅스 스틱 커피를 세 개 뜯어 뜨거운 물에 녹인다. 조용한 카페라떼 타임. 온전한 나만의 시간은 이때가 전부다. 1분 1초가 아쉽다. 작년 하반기부터 일주일에 3~4번 정도는 한 시간 내외의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셋째가 모두 어린이집에, 첫째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얼마나 황홀하던지. 아이들은 내 얘기를 들으면 한 모양으로 입꼬리가 쭉 내려가며 "엄마는 우리가 싫어!?" 하고 불평할 테다. "엄마는 너희가 싫은 게 아니야.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열심히 설명해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겠지?


 홈스쿨링을 하는 엄마가 뭐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나만의 시간이 필요 없는 게 아니다. 나도 친구 만나러 다니고 싶고, 뭐라도 배우러 다니고 싶다. 느긋하게 둘러보며 쇼핑도 하고 미용실도 속 편하게 다녀오고 싶다. 첫째를 낳은 후로 1년에 딱 한 번 미용실에 갔으니 9년 동안 아홉 번 갔다. 미혼 때는 두 달에 한 번씩 가는 바람에 디자이너 분이 그만 오라고, 머리카락도 쉬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는데!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을 이용하면 된다지만 그것도 온전한 시간은 아니다. 언젠가 짧은 카툰을 본 적이 있다.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엄마는 잠을 못 잔다. 어리면 물리적인 이유 때문에, 크면 걱정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아이들은 자다가도 엄마가 곁에 없으면 깨어 일어난다. 그러니까 내 시간을 보내려다가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년에 둘째가 여덟 살이다. 드디어 누나와 같이 '이른비 홈스쿨'의 입학생이 된다. 홈스쿨링 첫 해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막연함이 여전하다. 첫째와 둘째는 다르다. 너무 다르다. 다른 인간이니까. 첫째에게 먹혔던 방법이 둘째에게는 소용이 없다. 둘째와 평화롭게 내년 한 해를 보낼 수 있을까? 장담 못한다. 더구나 이제는 정말 완벽한 홈스쿨링 체제(?)로 들어간다. 한 살 아래인 셋째도 어린이집을 수료하고 프리스쿨러로 집에 있기로 했다. 흠. 이른비 프리스쿨이라고 해야 하나? 세 아이를 데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지금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허투루 보내지 않을 테다.


 선배 엄마들 말씀이, 아이들이 크면 자연스럽게 엄마의 시간이 확보된다고 한다. 어쩌다 한 번 남편이 주말에 아이들을 돌봐주고 나에게 '자유부인' 시간을 허락해준다. 그러면 엄청 좋은데도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다. 아이들이 이미 내 삶 깊숙이 들어와서 아이들을 빼어놓고는 내 삶은 설명도 지속도 안된다. 그러니 어느 순간 맞닥뜨리게 될 나만의 시간은 내게 외로움과 허전함만 가져다줄 수 있을 테다. 지금처럼 어쩌다 보내게 되는 자유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르겠지. 지난해 언젠가 친정 엄마가 말씀하셨다.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잖아. 정말 그래. 아이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나중에 진짜 외로워. 너만의 뭔가를 해야 해." 얘기를 들으며 엄마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시선을 떨구게 되었다. 엄마를 외롭게 한 장본인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미안하면서도 한편 그게 삶의 당연성 같다. 아이가 커서 건강한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이 육아의 목표라고 했으니까.


 빈 둥지만 바라보며 우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 여유 없는 시간을 쪼개서 뭐라도 하려고 한다. 작년부터 시작한 홈트(홈트레이닝), 독서모임, 글쓰기 등으로. 모든 것을 매일 할 수는 없지만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이어가려 노력 중이다. 지난주부터는 친한 친구와 새벽 6시에 구글 미트(화상회의 프로그램)에서 만나 한 시간 동안 각자 글쓰기를 하고 있다. 첫 이삼일은 새로운 것을 한다는 기쁨과 할 수 있다는 의욕이 넘쳤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감정들이 우유 거품처럼 주저앉았다. 글쓰기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가. 나는 나름대로 꾸준히 책을 읽는다고 읽어왔는데 머릿속에 남은 건 무엇인가?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이 일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 이성은 회의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3일 전에 빌려 온 유영만 교수의 책 [책 쓰기는 애쓰기다]에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 '크로노스'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 '카이로스'로 구분된다. 시간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고, 시간을 내서 의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세상은 크로노스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꿔나간다. 모두가 짧다고 생각하는 10분도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져진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용기를 얻었다. 나의 짧은 시간들, 많은 부분 아이들에게 방해를 받는 자유시간이지만 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나의 하루 한 시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저 적어도 나의 세상을 바꾸고 내 아이들의 세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지 않겠나. 방금 아이가 학원에서 하원했다는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벌써 50분이 지났다. 나의 카이로스는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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