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유월 Jul 26. 2020

영이


원형의 궤도를 따라 끝과 끝이 끝없이 맞물려 있다. 그건 세상을 그려보세요, 라는 지시에 의해 우리가 막막함을 느끼며 일단 그려본 그 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표시된 끝1, 끝2, 끝3… 은 결코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서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국경은, 실제로 무언가가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선언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었다.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이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살지 못하는 것은 버림을 택하기로 한다. 그래서 역사가 더도 덜도 말고 딱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자동성의 왕국, 자기 지시적인 궤도의 주인은 정말 코끼리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영”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름을 정확하게 붙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서쪽부터 동쪽까지, 길게 펼쳐진 시간을 곱게 접고, 접고, 또 접어서 까마득하게 정지한 시간의 정수리에선 모든 이들이 끔찍하게 느릿한 속도로 기어 다니며 계속 영원하게 살았다. 영아. 너한테 보이는 별의 개수만큼 나에 대해 생각해줘. 영이가 대답한다. 알았어. 이제부터 영이는 나의 개수가 몇 개인지 정확하게 계산해야한다. 그리하여 벌써-비로소-아직도 내가 분포하고 있는 평면의 형태가 그릇인지 모자인지에 대한 영이들의 말다툼이 분분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모자, 혹은 그릇이 영이의 음성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릇을 뒤집어쓰고 모자에는 미역국을 담아먹도록 해. 세계는 그렇게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끝났다. (내가 가진 성경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라톤 주자가 죽은 채 궤도를 계속 달렸다. 비극을 전하기 위해. 영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시민들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는 죽은 채로 도착해서 헐떡이지도 않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서 말했다. 영이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발. 영이를 가득 채워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마라톤 주자는 거의 횃불처럼 보인다. 그 뒤로 4년마다 영이의 죽음을 알리는 레이스가 개최되었다. 레이스의 참가자들은 떼를 지어 정상으로 향한다. 그들은 모두 익사한 잠수부들이며, 새까만 글자가 되어 모자 혹은 뱀의 검은 실루엣을 칠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