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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ug 01. 2022

답 없는 물음표

폴더폰 바깥의 창이 밝아졌다.  10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겨울밤의 농담은 여름밤의 그것과 뚜렷이 달랐다. 사위가 먹으로 붓칠   검었다.   이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내내  애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터라  생각이  났던 것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핸드폰을 열다가 그만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표정은 이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문자는 길지도 짧지도 않았는데 전하려고 하는 말은 분명했다. 한마디로 헤어지자는 말이었다.


문득 성탄 전야가 떠올랐다. 불과 엿새 전이어서 기억이 생생했다. 그 애는 내가 사준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약속 장소에 나왔다. 바보처럼 헤벌쭉 입을 벌리고 있는 내게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 안에는 손수 뜨개질한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짙은 회색 털실로 쫀쫀하게 짠 것이었다. 목도리의 한 올 털실, 한 땀 바늘에 새겨져 있을 시간과 마음이 선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앞으로 2년 동안 둘의 만남이 성길 게 틀림없는데도 왠지 마음이 놓였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이부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났다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엿새 전 목도리와 그날 문자를 직선으로 연결할 수 없었다. 두 점 사이에 빠뜨린 점이 없는지 골똘히 궁리했지만 기억하면 할수록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은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나는 옷장에서 회색 목도리를 꺼냈다. 혹여 때가 탈까 봐 귀한 유물처럼 고이 모셔 둔 것이었다. 커튼 틈으로 비친 가로등 불빛을 받아 털실이 반짝였다. 아무리 목도리를 들여다봐도 헤어지자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목도리나 주지 말지. 순간 목도리를 방바닥에 냅다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변명이든 설명이든 주장이든 간에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응당 그럴 권리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허나, 나는 당장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그달 핸드폰 통화시간을 모두 쓴 터라 112, 119 등 긴급전화를 제외하고 발신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은 매우 긴급했지만 나라가 정한 긴급전화는 나를 구할 수 없었다. 내 처지를 생각하니 쓴웃음만 나왔다. 그때 옷장 한켠의 동전 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바지의 양쪽 주머니가 배부를 만큼 동전을 두둑이 챙겨 황망하게 집을 나섰다.


당시는 WCDMA, 그러니까 훗날 3G로 불리는 이동통신 서비스가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다. 거리에는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띄게 지워져 있었다. 한참 헤맨 끝에 오래전 살았던 동네에서 낡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입김을 불어 언 손을 녹였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한 움큼 집어 선반에 올려놓았다. 추운지 성이 나서 그런지 손은 물론이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행여 다른 번호를 누를까 봐 숨을 고르고 숫자 버튼을 눌렀다. 통화연결음이 들렸고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자를 받고 한 시간 만이었다.


나는 저수지 수문을 열어젖힌 듯 말을 쏟아냈다. 그 애는 한동안 말없이 그걸 다 받아 냈다. 내 말은 숨찼고 그 애 말에는 숨가쁜 기색이 없었다. 나는 울부짖었고 그 애는 나를 달랬다. 그리고 한참 아무런 말이 없었다. 끝끝내 헤어져야 하는 연유를 듣지는 못했다. 불과 반 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화기를 붙잡고 하얀 입김을 토해내는 것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공중전화 옆 선반에 산처럼 쌓아 둔 동전 더미는 거의 그대로였다. 그날 밤은 지독히 길었다. 그해 마지막 해가 떴고 하루 뒤 해가 바뀌었고 그 후로 한 달 반쯤이 지났다. 나는 밸런타인데이 전날 군대에 입영했다.


군 입대 후 1년 넘게 지났을 무렵이었다. 부대에는 어김없이 봄이 왔다. 더러는 여자친구와 벚꽃놀이를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어느 날 같은 내무실 후임병이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나는 그 녀석의 손에서 봉걸레를 빼앗고 침상에 걸터앉혔다. 자초지종은 대략 이러했다. 휴가를 앞두고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별을 통보받았다는 것이다. 난데없는 일을 감당하기도 벅찬데 더군다나 여자친구의 상대는 지인이었다. 입대 전 셋은 한올진 사이였다고 했다. 후임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나는 한동안 잊고 있던 존재를 불러냈다. 군 생활 도중에 이별 통보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차라리 그 애에 관한 기억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서 운이 좋았던 걸까. 답이 없는 물음표만 떠올라 머릿속이 산란했다. 분명한 건 아직 그 애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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