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 빌라 사람들-7
흔히 ‘하드워커’로 표현되는 도시 생활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직업과 개성을 갖고 있다.
서울에 정착해 16년째 살면서 관찰해 온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20-30대를 지나오며 나는 한때 철저히 외롭고 고독한 인간상을 추구하게 됐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얽히는 직업을 갖다 보니 긍정 영향뿐 아니라 부정 영향을 받으면서 불면증 약을 먹고 정신건강의학과와 심리상담센터를 찾기도 했다.
타인에겐 진심을 감추는 게 쿨하다고 터득했고 쉽게 마음을 여는 건 관계를 제대로 주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은 상대가 나약하다고 느끼면 더 친절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가장한 권리 침해를 하는 이른바 가스라이팅을 하게 된다. 스스로도 상대를 위한 조언과 행위라고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고 느끼면 굳이 조종하려 들지 않으므로 깔끔하게 과잉 감정이 불필요한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네 개의 회사를 다녀봤다. 아이를 낳고는 세 번의 이사를 다녀 네 개의 집에서 살아봤다. 네 번 다 공동주택이고 수십 명의 이웃들과 함께했다.
처음 살던 신혼집에서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가족이 양 옆집에 살았다. 평소에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교류했지만 끝에는 이별이 좋지 않았다.
율이를 1년 동안 키워주신 베이비시터는 이웃들이 늘 나와 내 가족을 험담한다고 미주알고주알 고자질했다. 내용은 대부분 내가 육아와 살림을 못한다는 것이어서 일부는 사실이므로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알콜릭이던 옆집 여자는 이사오기 전 한 번은 술에 취해 우리 집을 와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우리 가족의 첫 보금자리였고 새로 분양받은 신축이었어서 집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지금도 남아있다.
서울로 이사와 두 번째로 살던 빌라는 전셋집이었는데 신축이었음에도 결로가 심해 가구, 옷 등이 곰팡이로 뒤덮였다. 임대인과 분쟁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이웃들과는 인사도 안 할 만큼 데면데면 지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다. 3년 반을 살다가 퇴거하기 직전에는 시설 보수 비용 문제로 억울한 일도 당했다.
다음으로 이사한 집에선 좋은 이웃들을 만났지만 임대인과는 사는 내내 분쟁을 겪었다.
우리는 서울로 이사 온 후 한 번도 예외 없이 1층 만을 계약했다. 층간소음 문제를 겪지 않기 위해서다. 임대인은 꼭대기 층에 살고 우리는 1층에 살았는데 그는 거의 매일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5층까지 들린다며 컴플레인을 걸었다.
쿵쿵 소리가 위로 몇 개 층을 올라갈 수 있는지 납득되진 않았지만 어린 자녀를 키우며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은 늘 조심하고 배려해야 하기에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보일러 노후로 인한 고장이나 수도관 동파로 마루가 한강이 됐을 때도 세입자 과실이 아닌 보수 비용을 내면서 금전 피해를 겪었다. 그래서 이사를 하면서는 홀가분했다.
무엇보다 퇴거의 발단은 임대인 허락 없이 반려동물을 키운 것이 계약 해지의 사유가 됐다.
사회와 가정에서 매일 부딪치는 사람들은 크고 작게 나의 기분을 결정하고 이것이 쌓여서 일상, 나아가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존재임을 느낀다.
그래서 40대에 들어 생각이 바뀐 건 사람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면서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냉정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정하고 따뜻하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강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매일 10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회사 사람들도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겠지만, 같은 공동주택 안에 얽히고설켜 사는 이웃은 삶의 터전을 안락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다.
지금 사는 빌라로 이사 오고 나서 사람을 대하는 나의 가치관에도 잔잔한 변화가 일고 있다.
얼마 전엔 아이의 생일 파티를 위해 친구 열 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서 놀다가 지루해진 아이들이 주차장으로 가 킥보드를 탔다가 옆 빌라의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야! 조용히 해!”라며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나라면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에 아이들을 단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바마 이모의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이모는 소리를 지른 아저씨의 부인과 통화를 하게 됐다.
“여보세요. 그 빌라 아이들이 왜 그렇게 시끄럽죠?
주말 낮에 쉬고 있었는데 너무 불편하네요.“
“네. 죄송합니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킬게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주말 낮 시간인데 그렇게 많이 불편하신가요?
밤에 일하시는 직업도 아니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 게 아니라 재잘댄 것뿐인데.
저는 자식을 안 낳아봤지만 새 지저귀는 소리보다 좋게 들리는데요.“
통화를 끊고 나서 오바마 이모는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공동주택에 사느냐며 화를 냈다. 아이들을 집에 들어오게 하려고 뛰어나가는 나에게 오바마 삼촌은 “아이들 조용히 시키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 빌라에도 층간소음 분쟁이 있고 때로 서운한 일이나 오해로 인한 갈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니까.
하지만 이날 사건으로 임대인 부부를 보는 내 시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감사와 감동은 당연했고 살면서 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옳은 행동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며칠 후에 회사에서 후배가 층간소음 갈등이 있는지 물어보게 되어 이날의 사건을 말했다가 싸움이 났다.
회사 후배는 오바마 이모와 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주말 낮이라도 누군가는 쉬고 싶을 수 있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새 지저귀는 소리 같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자 주관적이어서, 자기처럼 아이들을 싫어하는 입장에선 스트레스를 받겠다는 말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으니까 그만해. 나는 층간소음 이슈가 있었냐고 물어본 말에 내 경험을 알려준 것뿐이지 공감을 얻거나 내 행동을 지적받고 싶은 게 아니었어.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 부딪치고 서로 이해시키는 건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너와는 이 문제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다.“
말했지만 우리 빌라의 이웃들도 늘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작은 일로 다투고 화해하고, 서로 안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식으로 대화한다.
그럼에도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상대의 말과 생각을 존중하며 존중받는 느낌도 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 자식들을 출가시킨 노부부, 수험생 가족,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 싱글. 다양한 형태의 이웃이지만 좋은 음식을 먹게 되면 누군가가 떠올라서 나누게 되고 특별한 날엔 파티를 하거나 선물을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앞날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고 잘 유지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 복잡한 일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보단 세련되고 여우 같은 면도 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단치는 않다.
한 번은 고향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서울에 살아서 제일 좋은 게 뭐야?”
생각해 보니 없는 것 같아서 당시엔 대답을 못했다. 내 월급만큼 주는 직장은 지방에도 많다. 주거비용은 지금보다 반의 반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학교를 다닌 천안은 교육 인프라가 서울만큼 좋은 도시다.
그때 생각 못했던 답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이곳에 살면서 만난 광범위한 세계의 사람들은 나의 경험 자산이자 영감을 주고 사고를 확장하는 데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스무 살이 되기 전 내가 아는 사람들은 회사원, 은행원, 자영업자가 다였다. 지금은 문화 예술, 인플루언서, 창업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은 나에게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간접 경험을 알게 했다.
도시의 다양성은 사람에게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