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화수요자 Sep 16. 2018

10년 주기로 느낀 불안의 간격

'불안' / 알랭 드 보통

Ted 강의로 먼저 본 알랭 드 보통의 ‘불안’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가 있다. '그동안 내가 뭘 했지?'하고 떠올리면 대부분의 시간에 '무얼 하는 것'과 동시에 '불안'에 떤 걸 알게 된다. 특히 20대 취준할 때 가장 힘들었는데 당시 날 많이 걱정해준 언니가 있었고, 어느 날 카톡으로 Ted 강의를 하나 보내줬다. 당시 스물네 살, 나는 대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진로 고민에 한참 빠졌었고 강의를 보는 내내 눈물을 쏟았다



이 강의에서 주로 말하는 것 중 하나가 '속물근성'이었고, 책으로 더 자세히 풀어져있단 소리를 어디서 들었다. 그래서 바로 책을 사 읽고, 새빨간 겉표지처럼 빨간 내 속사정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출처 : 구글 검색


알랭 드 보통은 현대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현대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불안의 주요 원인으로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등을 키워드로 잡는다. 꼭 내 얘기 같은 이야기들에 계속 밑줄 치고 책장 끝을 접기 바빴던 책이다.


아마 대다수가 ‘불안’이라는 주제에 공감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자랐다면 말이다. 오죽하면 ‘불안하지 않을 때 불안해’라고 애들이 말할 지경이니.. 왜 불안이 당연시된 걸까? 이 질문에 우선 ‘나’ 자신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뒤쳐질까 봐 불안했던 10대

길에서 찍은 학생들의 뒷모습

중학교를 입학할 때 우연히 전교 1등을 했다. 운 좋게 찍은 문제가 잘 맞았던 건지 갑자기 내가 전교 1등이란 소식이 돌았고, 입학식 날 학생들을 대표해 선서까지 했다. 평상시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던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저 친구들이랑 뛰어놀기 좋아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1등이 되고 나서부터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모든 선생님이 내게 관심을 가졌고, 익숙지 못한 기대 어린 시선에 나는 어딜 갈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단지 입학시험으로 1등을 했을 뿐인데 처음 본 선생님들은 엄청 기대에 차 계셨다. 매번 꼴통들만 들어온다며 낙인찍힌 초등학교 출신이었고, 처음 그 학교 아이가 전교 1등을 했으니 ‘어디 한 번 해봐라’는 입장도 함께였다. 그래서 열네 살의 내 어깨에는 괜히 모를 사명감과 책임감이 올라와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세운 목표는 1등하자가 아니라 ‘유지하자’였다. 그러고는 곧 뽀록이 났다. 첫 중간고사 때 난 3등을 했다.


열공하던 10대 시절(feat. 막내 사촌동생과 외할머니)

당시 내가 한 최선의 방법은 암기였고, 나는 교과서를 모조리 외우는 편을 택했다. 하필 변별력이 크게 없는 중학교 교과과정이라 지엽적인 문제에서 순위가 갈렸고, 교과서뿐 아니라 문제집까지 외우며 나는 금방 지쳐버렸다. 그래서 5등 안에 머무르다가 1년 후엔 10등, 2년 후엔 20등 근처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받던 기대에 찬 시선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130page /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무관심

불안함은 그러고도 계속 나를 감쌌다. 내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어떡하나.. 이게 10대 때 제일 큰 고민이었고, 결국 20대가 될 때까지 다시는 1등을 하지 못했다. 그냥 원래대로 중위권 성적의 학생이 되었고, 그냥저냥 평범한 사람이 되어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청춘을 놓칠까 봐 불안했던 20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보면 반갑다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나누던 시절

20대에는 진짜 진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큰 벽은 남들이 다 좋다는 직업과 내가 좋아하는 직업의 차이였고, 곧 큰 혼란으로 다가왔다. 졸업 이듬해 4년 간 배운 인류학을 응용하고 싶어 문화예술 + 사회공헌 성격을 띤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수업과 함께 틈날 때마다 일을 병행하며 곧 현장은 내 생각과 크게 다른 이상일뿐이었단 걸 알게 됐다. 미술관, 연구원, 비영리 단체, 조교를 거쳐 한참 두려울 때는 공무원 공부도 짧게 하고.. 사진했던 걸 살려 늦깎이로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트도 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논문 쓰고 졸업 후 스타트업까지 가는 헥헥.. 아주 방황하는 일만 연속되었고 매 순간 불안에 떠는 20대를 보냈다.


잠시 공무원 공부하던 시절 자취방

'아- 이래서 다들 공무원 공무원 거리고 대기업 대기업 그러는 걸까?' 하는 의문을 내내 가지면서 ‘20대를 놓치면 내 인생도 놓칠 거’라는 망상에 사로 잡혔었다.


12page /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면서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날 깎아내릴 일도 늘었다. 요즘 20대들이 친구도 잘 안 만나는 이유를 정 없다고 할 게 아니라 그만큼 치열하고 불안감이 가증됐기 때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알 수 없고 나는 공감하면서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너무 힘드니까ㅠㅠ..


강의실에서 열공하는 학생들


36page / 이 병은 애초에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점차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양 쫓아다니게 된다.
 37page / 지위의 상징들을 다급하게 갈망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팔고 다니거나 호사스러운 장식물에 연연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 문장이 내 이야기인 줄 알았던 20대. 질투도 늘고 힘들어도 안 그런 척 많이 했던 거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계속 부딪히면서 결국 그런 생각들은 부질없는 감정일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다행히 30대가 되었을 때쯤엔 그동안 가진 불안보다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불안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범한 인생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한 30대

한강 망원지구에서 어느 가족의 일상

‘평범한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다’라는 어른들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아직도 온전한 내 자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직장에 다니지만 요즘은 그나마 매일매일에 집중하며 산다. 그러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한 가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법을 알게됐는데 작년에 한 친구가 감사일기 쓰는 걸 추천해줬다. 하루에 3가지 감사한 일을 쓰면 정말 별 거 아닌데 달라진 삶을 느낄 수 있다나 뭐라나. 그 말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2018년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감사일기를 쓰고 있다. 그 이후로 나는 확연히 풍족해진 매일을 갖게 되었다.


114page /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238page /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309page /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지금 내가 갖지 못한 것들도 엄청 많지만 가진 것들도 그마만큼 많다. 크게 욕심은 안 부리되 하고 싶은 몇 가지는 꼭 하는 걸로 스스로 합의점을 봤다. 여행을 간다든지 보고 싶은 책을 꼭 산다든지? 그리고 불안이란 요소를 방해가 아닌 동기가 되는 연료로 사용하려 한다. 조금씩 더 나아지는 삶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불안' 속 이야기들은 어두운 현실을 짚어주지만 또 반대편에 비친 밝은 단면도 보여주려 한 거 같다. 이 책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이 좋아져 이후 몇 가지 다른 에세이집도 봤지만.. 음.. 아직 '불안'만큼 와 닿은 책은 없는 거 같다.


센치해진 가을에 특히 읽기 좋은 ‘불안’ 이번 추석 연휴 때 집에 가서 꺼내봐야겠다 :)


메인 사진 : 저녁 노을이 내린 한강, 한강 난지지구, 2018


*캡처나 출처를 밝힌 경우를 제외한 모든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었고, 저작권은 본인(@yuoossoo)에게 귀속되어 있습니다. 불펌을 금지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과 사진에 대한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