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났거나 한이 많거나
어릴 땐 소심했는데 사춘기가 지나면서 성격이 변했다. 소심한 성격으로 살기엔 세상이 너무 각박하다고 느꼈고,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강해지기로 했다. 그 강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등학생이 딱히 드러낼 게 없었다. 그래서 생각 한게 말을 좀 세게 하거나 빨리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많이 하는 것이 강해 보였다. 동네에서 아줌마들이 싸울 때나 정치인들이 싸울 때 보면 누가 더 말을 많이 하고 더 빨리 하느냐가 중요해 보였다.
말을 많이 하는 성격으로 바뀌게 되자, 다른 이들이 내 마음을 함부로 해석하거나 만만하게 보는 일이 없었다. 그 당시 학교엔 왕따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소극적이고 말이 없는 학생은 소외되어 보이기 쉬웠다. 내가 말없이 앉아 있으면 한 친구가 다가와서 이런 적도 있다. '넌 항상 우울해 보여.'
선천적으로 말이 없는 아이가 말을 많이 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해서 뭐하나 하는 말도 일단 내뱉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이렇듯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나의 투머치 토커 생활은 어느덧 40년이 되어간다. 사회생활 할 때도 투머치토킹은 유리했다. 내가 설계한 도면을 설명할 때 남보다 한마디 더 얹어서 근사한 컨셒으로 포장했다. 교사일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지루하고 어려운 공부를 쉽게 설명하려면 남보다 한마디라도 더 설명하는 게 유리했다.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그랬다. 그윽하고 다정한 말 몇 마디만 하면, 자기 할 일을 척척 해내는 자식을 둔 '엄마.' 그런 복은 내게 없었다. 방 치우라고 할 때나 숙제를 먼저 하고 게임을 하라고 할 때나 몇 마디라도 더 해야 하는 척이라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되돌아보니 내가 너무 말을 많이, 빨리 하고 있었다. 나이가 드니 좀 우아해지고 싶었다. 말을 되도록 천천히 하고, 핵심 있게, 딱 필요할 때만 말을 할 수는 없을까.
요즘은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유튜브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된 요즘, 오히려 말을 좀 못 해도 진정성 있게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말을 많이 하는 이유가 뭘까. 학창 시절 내 성격을 억지로 바꾸고 싶었던 것에 답이 있다. 소심한 성격을 타고난 것도 있지만 불행한 환경에 그 원인이 있다. 환경은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내가 말을 많이 하게 된 것도 힘듦이 원인이다. 힘듦을 드러내기 싫어서 억지로 가면을 쓴 것이다. 어두움은 나를 움추러들게 만들어 말을 빼앗아갔지만, 억지로 나를 끌어올려 말을 퍼 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움츠러든다.
그 안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내 경우에만 해당될지도 모르지만, 말을 너무 많이 할 땐 두 가지 경우중 하나다. '신이 났거나 한이 많거나.'
학창 시절 인기 만화였던 캔디가 생각난다. 만화 속에서 말괄량이 소녀로 남들에게 유쾌함을 주던 소녀. 그 소녀가 말괄량이라는 설정이 의외다. 고아에다 주변엔 모함자들이 가득한데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웃고 명랑한 척하는 것이다. 그래야 남들이 덜 깔보니. 선천적으로 긍정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화 주제곡을 보면 긍정적이라서가 아니라 자길 속이는 것이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은 바보다. 캔디 캔디야.'
지금쯤 환갑을 넘었을 할머니 캔디에게 말해주고 싶다.
"괴로울 때 슬플 땐 울었어야 돼. 참긴 왜 참아. 우는 게 건강에도 좋대. 그렇게라도 털어내야지. 거울보고 혼잣말은 왜 하니? 그거 독거노인들이나 하는 거야. 그리고 울면 바보가 아니야. 자연스러운 거야. 억지로 말을 많이 하거나 명랑한 척도 하지 마. 결국은 드러나니까. 무엇보다 미운 사람한텐 착하거나 웃지도 말았어야 해. '강 강약약'이 좋아. 널 괴롭히는 사람들은 비열하게도 '강약약강'이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