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어느 주말, 마루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친구분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친구분이 가수 싸이와 태양의 공연 티켓 두 장이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가고 싶어 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난색을 표하셔서 내가 아빠 대타로 가게 되었다. 공연 장소는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 홀이었다. 새로 생긴 공간에 대한 궁금함, 가수 싸이와 태양의 공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집에서 멀지 않은 그곳에 금방 도착했다. 빅뱅이 아닌 가수 태양의 노래는 나만 바라봐와 눈, 코, 입 밖에 모르는 관계로 정적으로 즐길 수밖에 없었는데 가수 싸이가 등장한 순간 나를 포함한 관객의 판이 뒤집어졌다.
그에게는 몸을 들썩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히트곡들이 너무 많았다. (쭉쭉 늘어나는 니트 롱스커트를 입어 망정이지) 치마를 입었다는 사실도 잊고 말춤을 비롯한 여러 댄스를 따라췄다. 삼십 대 중반 이후로는 클럽, 록 페스티벌 등을 가지 않다 보니 이런 분위기에 오래 굶주린 것이 티가 났다.
스트레스를 춤에 날려 보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공연장을 나오는데 그제야 인스파이어 리조트의 공간이 조금씩 보였다. 역시 눈에 띄는 건 천장을 뒤덮고 있는 미디어 아트 설치물이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묵어봐야지 막연히 생각했다가 그 기회가 빨리 찾아오게 되어 5월에 다시 찾게 되었다. 새로 생긴 5성급 호텔답게 룸컨디션이 쾌적하고 깔끔했다. 전체가 개방된 것은 아니었지만 실내 워터파크 스플래시 베이에서 튜브를 끼고 아이처럼 물놀이도 했다. 호텔 숙박권을 판매한 곳에서 액티비티에 대한 옵션을 다르게 팔았는데 내가 선택한 건 르스페이스 이용 티켓이 포함된 패키지였다.
신문에서 복합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인스파이어를 홍보하는 보도 자료를 읽다가 이 공간이 퍼스트 아메리칸 중 하나인 모히건 족이 세운 모히건 사의 사업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사업장은 북미에 7개가 있는데 8번째의 사업장이 바로 영종도의 인스파이어였다. 자본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어 하는 곳이 규모까지 압도적일 때 그 출처가 궁금해지는데 역시 미국 자본의 힘이었다.
왜 하필 그들의 선택이 한국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방문을 해 보고 나니 어렴풋이 수긍이 되었다.
막대한 자본으로부터 탄생한 화려한 결과물을 향유할 자세와 돈을 가진 한국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인터넷에 인스파이어를 치면 방문을 인증하는 사진과 리뷰가 쏟아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탁하지 않아도 이토록 부지런하게 홍보까지 해준다는 것.
나도 갔다 왔다는 글을 쓰는 지금 나의 심리 상태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얘도 갔다 왔고 쟤도 갔다 왔다는데 나도 질 수 없다는 경쟁심, 회사 가기 싫어 병을 앓으면서도 지금 당장 이 정도 지를 수 있게 해주는 월급에 대한 억지 의미 부여. 맹목적으로 유행을 좇는 건 싫지만 어느 정도(?)는 트렌디해 보였으면 하는 욕심, 자본이 제시하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와 그 공간에 대한 순수 호기심.
'미지 세계로의 여행 (Beyond the Cosmos)'을 주제로 19개의 공간 18개의 전시 콘텐츠를 선 보이는 르스페이스는 호텔 숙박일이 아닌 추석연휴를 이용해 다녀왔다. 실감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빅뱅, 평행 우주, 외계 행성, 화산이 폭발하는 대지, 심해, 야생 동물이 뛰어다니는 숲, 꽃이 자라는 사막 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간접 경험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인간인 나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호텔 패키지에 포함된 르스페이스 티겟은 VIP express 티켓이었는데, 입장할 때 직원이 티켓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대기 없이 입장할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영상을 감상할 때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관람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우주여행을 떠나는 짧은 영상이 나오는 상영관 앞에 열 명정도의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VIP express 티켓을 내밀자 직원이 아무도 없는 옆 줄에 서라고 했고, 상영관도 가장 먼저 들어가게 해 줬다. 몇 만 원의 차이로도 이렇게 덜 기다리고, 사람들과 덜 부대끼는데 이보다 더 많은 돈의 차이는 어떤 benefit의 차이를 가져올까. 자본주의의 일반 상식이지만 왠지 씁쓸했다. 돈을 벌 때는 이 인풋-아웃풋이 맞아? 싶었는데, 돈을 쓸 때는 그 대가의 확실한 차별과 차이에 정신이 번쩍 든다.
단순하게 자본의 엔터테인먼트를 체험하러 갔다가, 자본주의의 냉정함에 대해서 한 수 배우고 왔다. (자연인이 되지 않는 이상) 싫어하는 사람을 안 보고 싫어하는 일을 안 하고 싫어하는 꼴을 안 겪는 파워는 돈에서 나온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회사 다닐 이유가 월급 밖에 없는 직장인으로 변모하다 보니, 싫어하는 상황을 제거시켜 주는 돈의 위력에 대해 자주 곱씹고있다.
무질서의 우주와 환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곳에서 판타지를 판타지로 즐기지 못하고, 굳이 현생의 질서를 운운하는 나도 참 나라는 생각을 하며 미지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