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 함께하는 일상과 나눔의 기록, 가족 신문 만들기 >
아이들과 함께 한 소중한 체험들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 순간을 다시 떠 올리게 해 주고, 둥근 보름달처럼 우리의 마음을 밝고 환하게 해 준다.
< 가족이 함께하는 일상과 나눔의 기록, 가족 신문 만들기 >
우리 부부는 직접 만들어 가는 문화(Self Entertaining Culture)에 관심이 많았다. 작은 것들에서부터 실천을 해나가던 가운데 우리 가족은 재미있는 일을 시작하였다.
1994년 여름, 어머니 회갑을 앞두고 뜻깊은 선물을 찾던 남편이 문득 가족신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지만 금세 모두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큰 회갑연 대신에 조촐한 축하연을 하고 창간호를 만들었다. 창간호의 반응이 좋아 곧이어 다음 호도 만들게 되었다. 그 후 1년에 두세 번씩 신문이 계속 나오면서 우리 가족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가족신문은 우리의 밝음과 어둠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하게 해주었다. 만약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은연중에 어두운 부분을 감추려 하면서 점차 우리의 삶에서 동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가족신문은 현재 우리의 삶을 확인하고, 기록하고, 또 그것을 나누어 보는 실험의 장이었다. 부모님, 남편의 6남매 부부, 아이들 열두 명이 함께 참여해 특집 기획을 마련하고 삶의 다양한 주제들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면서도 ‘함께 사는 삶’에 대한 고민과 따뜻한 관계를 이어 가려는 노력이었다. 때때로 친구와 이웃이 참여하는 열린 가족, 열린 마음 코너도 만들어 주변 사람들의 삶도 함께 나누었다.
신문 이름은 남편 가족의 고향 이름을 딴 <가랫골 우리 집>이다. <가랫골 우리 집>은 미국, 서울, 강릉, 부산, 청주에서 살아가는 우리 가족 3세대 간의 소통과 나눔의 장이 되었다. 물론 이 일을 20여 년간 계속 해오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가랫골 우리 집> 간행의 일등공신은 아버님이었다. 편집장인 남편이 다음 호에 대한 기획을 제안하면 늘 아버님의 원고가 1등으로 도착했다. 놀라운 필력에 분량도 수십 장에 달했다. 아버님께서는 교직에서 은퇴하신 후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계셨다.
솔이와 현이는 미국 친구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농사를 지으신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아이들은 아버님께서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와 아버님의 어릴 적 이야기도 무척 좋아했다.
신문의 최종 편집은 늘 남편이 했다. 그래서 나와 아이들은 인쇄되기 전 따끈따끈한 글을 먼저 읽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인쇄된 신문이 도착하면, 그날 저녁 식사 후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읽었다.
아이들이 쓴 글은 아이들이 읽고, 내가 쓴 글은 내가 읽고, 남편이 쓴 글은 남편이 읽었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가랫골 우리 집>을 읽으며 우리 가족은 참으로 행복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우리 부부와 솔이가 가족 신문에 낼 원고를 쓰고 있을 때였다. 우리를 지켜보던 여덟 살 현이가 갑자기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그림으로 그리고는 원고라며 내밀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매회 특별 주제가 재미났다. “우리 집 일요일 아침의 풍경” “3세대인 어린 고슴도치들이 부모들에게 제일 듣고 싶은 말, 제일 듣기 싫은 말은?“ ” 남편들에게서 보이는 시아버님 모습“ ”“우리 엄마, 아빠가 내 나이였을 때 이야기 듣고 쓰기” 따위 여러 경험을 나누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한글을 잘 쓸 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를 받아써 왔다. 우리 셋은 깔깔 웃으며 현이가 그린 그림의 의미를 알아맞히려고 애썼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는 재미있는 추억이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겪은 크고 작은 이야기 가운데 일부는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 그런데 우리 식구가 만든 가족 신문 창간호부터 20여 년의 기록을 펼쳐보면 이 모든 일이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히 되살아난다.
세월이 흘러 다시 펼쳐 보니 우리 가족과 함께 해온 이웃들과의 소중한 삶의 기록도 많이 담겨 있다. 언젠가 온 식구가 모이면 다시 하나씩 펼쳐 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일상의 기록이 모여 결국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된 것이다.
20 여년 계속 되어오기까지 가족 신문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계속 할 수 있었던 동력은 다른 무엇보다 서로의 진솔한 생활을 나누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족 신문은 언제나 관객의 위치에서 텔레비전, 신문, 소설 등을 객체로 바라봐 왔던 우리가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문화적 의미의 경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