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하철 안을 통과하는데 벽에 붙여진 커다란 여성의 속옷 광고 포스터 위로 누군가 ‘섹시스트!’ 라고 적어둔 글을 보았습니다. 그 포스터를 지나쳐 조금 더 걸어가니 긴 굴 같은 어두운 복도 중앙에서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딱히 엄청난 실력의 연주나 노래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무도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표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표현할 힘을 빼앗으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대단한 작품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글을 쓰는 것 모두가 우리를 표현하며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증명해 나가는 행위인 것이죠. 그 중에서 예술은, 의식주와 멀리 동떨어진,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표현 행위라는 주장을 해보고 싶습니다.
박이소(1957-2004), 정직성 - honesty 번안 - 박이소 작가님이 직접 부른 정직성은 꼭 들어봐야한다. 가사 그대로가 살을 뚫고 내부로 찔러들어오는 느낌.
18세기가 될 때까지도 창조는 신의 영역에 가까웠습니다. 창조의 행위는 신만의 고유한 활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크리스티안 볼프의 저서 «형이상학(1720)»에서도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창조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라는 명제가 주도적이었던 예술 이론의 세계에서 진리(眞理)는 신의 결정이었고 예술은 그 진리를 탐구해가는 행위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의 사전적인 정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혹은 참된 이치나 법칙입니다. 인간은 죽는다. 와 같은 필연적인 사실이죠.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사유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특히나 신이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 만들 수 있었던 다른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에서 굳이 이 세계를 선택하고 구축하였다는 데에는 그에 부합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가능성의 세계론은 자연스레 예술이론으로 옮겨왔고, 라이프니츠는 소설을 예로 들며 이 가능성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을 제시합니다. 있을 수도 있는 우연적인 가능성의 세계에서 예술작품은 예술의 창조를 통해 현실성의 세계로 옮겨온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리하여 신이 결정하는 진리와 닮아집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 진리에 근접한 무언가를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현재의 세계에서 만들어내는 것이죠.
클로드 모네, 까미유 부인의 죽음(1879)
예술은 이러한 사실의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진리와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낱 인간으로서 진리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영화를 만드는 친구가 말했습니다. 자신은 영화를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마치 저주와 같다고요. «만엔 원년의 풋볼»을 썼던 오에 겐자부로도,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저주. 아내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까지도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모네와 같이, 우리는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지독히 아름다운 저주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