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떠난 첫 여행
8일째 아침. 여행이 절반 이상 흘러갔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가, 조식을 먹으러 가며 스르륵 사라졌다. 역시 돈지루에 밥과 빵을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그래 기분이 다운돼봐야 나만 손해지라는 생각을 하며, 호텔방으로 들어가서 기분 좋게 함 잠잤다. 그 이후로는 마지막 날 빼고는 아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일은 단체관광차를 타는 날이라 늦잠을 잘 수 없으니 오늘 푹 자 둬야 했다. ㅎㅎㅎㅎ. 평소보다 좀 더 길게 한잠 늘어지게 자고 호텔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노야마 애슬레틱 파크. 유이레일 오노야마 공원역에서 바로 연결되지만, 호텔에서 도보로도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걸었다. 서울로 치자면 잠실 종합경기장 정도 되는 느낌인데, 공원처럼 잘 만들어져 있어서 스포츠 경기 관람이 아니어도 산책을 하거나 피크닉 하기 좋은 곳이다. 이날도 유치원에서 소풍을 나왔는지, 여기저기서 귀여운 삐약이들... ㅎㅎㅎㅎ.
현립 무도관 등 여려 체육시설이 있는 곳이지만 역시 메인은 야구장인 오키나와 셀룰러 스타디움이었다. 오키나와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이 없지만 시즌 중에 교류를 맺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몇 경기하기도 하는 곳이 셀룰러 스타디움이었다. 그리고 매년 자이언츠가 스프링 캠프를 차리는 곳이었다. 한국 야구팀도 종종 스프링 캠프를 차리는 곳이 셀룰러 스타디움이었다. 기아 타이거즈는 항상 중부 차탄 지역 야구장에 캠프를 차렸지만. 그래도 야빠이자 갸빠로써 야구장 구경은 필수 코스인 것 같아서 둘러봤다.
셀룰러 스타디움은 외야가 잔디로 덮인 구조로 대략 25,000석 내외인 규모인 것 같아서. 챔피언스 필드도 이렇게 지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1년엔 아직 챔필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리고 외야 밖에도 공원처럼 마련된 잔디밭이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겠지만, 경기장의 열기를 느끼기엔 충분한 것 같아서 열린 구조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유롭게 야구장 내부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물론 그라운드는 아니고 전시장으로 마련된 곳이었지만. 경기가 없는 날에도 자연스레 찾아올 수 있는 구조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내부에 있는 전시관을 구경했다. 셀룰러 스타디움의 연혁이 간단하게 포토월 형태로 전시되어 있었고, 이곳에 의미가 있는 기록을 만든 배트와 야구공을 전시해둔 것도 흥미로웠다. 물론 죄다 일본어로 쓰여있어서 무슨 기록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야구장 구경을 마치고 공원을 걷고 있는데, 소풍 온 유치원생들과 문제의 미끄럼틀을 발견. 대략 40m는 넘을 것 같은 길이에 높이는 건물 4층 이상 될 것 같은 작은 동산을 끼고도는 미끄럼틀. 바닥도 롤링 방식으로 마치 거대한 컨베이어 같은 느낌의 미끄럼틀. 멋모르고 탔다가 중간쯤 내려왔을 때 가속도는 무게에 비례한다는 걸 깨닫고 크록스로 미끄럼틀 양쪽 벽을 긁듯이 브레이킹을 하면서 속도를 줄이며 내려왔다. 그게 아니었다면 날아가 버렸을 것 같은 엄청난 미끄럼틀. 그래서 위험하니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타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무 해맑게 탔다. 그 상황이 너무 귀여워서 카메라로 기록했는데, 그 와중에 아이들이 브이를 해주는 여유를 보이고. ㅎㅎㅎㅎ. 그런데 역시 가속도는 무게에 비례하는 거라 내가 탔던 것보다 너무 안정적이고 적당한 속도로 내려와서 안도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경고를 어긴 녀석들을 불러서 호되게 혼내기 시작했고 즐거웠던 소풍은 갑자기 대성통곡하는 분위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는 아이, 억울한 표정으로 한쪽에서 선생님을 노려보는 아이, 여전히 마냥 즐거운 아이 굉장히 뒤죽박죽이었는데, 그것도 그 혼돈이 장면 자체가 너무 귀여워서 한 참을 보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을 뒤로하고 공원을 좀 더 걸었다. 점심을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었더니 허기가 밀려왔지만, 저녁에 가이드와 약속이 있었기에 참고 산책을 계속했다. 저녁에 가이드를 만나 마치 친구를 만난 듯 며칠간 경험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간단한 식사를 하는 술집 같았는데,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아와모리를 주문했다. 그래도 오키나와에 오셨으니 한번 드셔 봐야 한다면서. 23도부터 45도까지 다양했는데 30도짜리 아와모리를 시켰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30도 정도부터는 섞어 마시는데 다음날 숙취를 적게 하려고 치차 우린 물을 섞어 마신다며 노란색 물을 마치 소맥 말 듯 섞었다. 묘한 맛인데 뭔가 적당히 부드러운 느낌이라 술술 넘어갔다. 그 와중에 아와모리 본래의 맛을 느끼고 싶어서 섞지 않고 한잔 마셨는데, 뭐랄까 사케보다는 안동 소주에 가까운 맛있었다. 굉장히 정성스레 만든 소주 느낌.
아와모리를 마시고 나오는 길에 라멘집에 들렀다. 둘 다 간단한 안주를 먹었지만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그래도 안주로 라후테(오키나와식 돼지고기 찜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남쪽으로 튀어를 읽으면서 오키나와에 오면 반드시 먹고 싶었던 요리라서. 라멘집에 들러서 가이드의 추천대로 한 그릇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 맥주 한 캔. 아와모리로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